[ 부자동네타임즈]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끝내 기대를 저버렸다. 한국 등 주변국들과의 불행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절호의 기회를 특유의 꼼수와 이중성으로 우회해 버린 것이다. 역대 일본 총리로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대에 선 아베 총리는 연설 대부분을 미국에 대한 반성과 화해, 향후 미일동맹의 미래에 할애했다. 그는 자신이 워싱턴의 2차 세계대전 기념관을 다녀온 얘기로 연설을 시작하면서 "깊은 후회의 마음으로 한동안 거기서 묵념했다"며, "2차 세계 대전에서 숨진 모든 미국인의 영혼에 깊은 경의와 영원한 애도를 보낸다"고 말했다. 최고 수준의 사과와 반성의 표현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식민수탈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한국 등 주변국에 대해서는 "일본의 행동이 아시아 여러 국가에 고통을 안겨준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선 안 된다"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사과나 반성의 표현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특히 우리 정부가 그의 역사인식 지표로 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은 늘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여성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전부였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던 것보다도 후퇴한 표현이다. 마이크 혼다 의원의 초청으로 방청석에 앉아있던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연설이 끝난 뒤 "아베, 역사를 부정하는 병을 안 고치면 당신은 스스로 망할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니 가슴이 미어진다.
그의 이중성은 이게 다가 아니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참혹했던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 해병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가 퇴역 후 이오지마 추모사업에 참여한 로런스 스노든(93) 전 중장과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전 일본육군 중장의 외손자 신도 요시타카 중의원 의원(전 총무상)이 방청석에서 악수하도록 연출했다. 그러고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적들이 영혼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고 소개해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역사적 화해의 상징으로 내세운 요시타카는 대표적인 일본 극우 인사다. 해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주변국의 반발을 샀고,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망언을 일삼아온 것이 그다. 과거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미화에 앞장선 인물을 화해의 상징으로 내세운 아베 총리의 이중적 태도를 미 의회 의원들이 짐작이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의 후안무치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보면 8·15 이전에 나올 종전 70주년 담화 역시 이번 연설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미일 신밀월이라고 불리는 격상된 동맹으로 날개를 달게 된 아베 총리는 한국 정부의 진정성 있는 과거사 태도 변화 요구를 더욱 무시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의 태도변화가 없이는 정상회담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한국 정부로서는 한일 관계 개선의 출구를 찾기가 더욱 어렵게 된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 과거사 면죄부를 주고 한일 간 갈등에서 일본쪽 편에 선 현실도 우리 외교의 운신폭을 좁히고 있다. 우리 외교가 자화자찬이나 상황 합리화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닥쳐온 외교적 현실이다. 그러나 반전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 상반기에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또 9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항일전승기념식에 참석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서 한중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새롭게 마련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기회를 우리 외교안보팀이 유야무야 날려버려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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