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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협.jpg |
(서울=포커스뉴스) 2020년까지 국민의 권익과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20대 국회를 향한 총선 후보 등록이 오늘(24일)부터 시작된다. 후보 등록 첫 날부터 언론지상은 탈당, 보복, 심판 등과 같은 부정적 담론들로 어지럽다. 기이하게도 명분은 모두 '국민'을 앞세운다. 과연 그들의 속마음도 국민을 향하는가. 따져 봐야 한다.
한때 우리 정치에 '국민 우선'이라는 슬로건이 풍미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슬로건으로 기억한다. 범박(汎博)한 식견이지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People first'가 떠올랐었다.
90년대 중반 재선을 향하던 클린턴 주변의 전략가들은 스캔들과 혼돈의 선거 가도에서 미국 국민들의 주된 관심은 '경제'라는 점에 주목했다. 선거공학적으로 박빙의 선거판을 뒤흔들 소수 그룹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아젠다(Agenda)들을 찾아낸다. 그 아젠다는 공화니, 민주니 전통적인 이념과 정강을 벗어났더라도 대선 정책과 공약으로 채택하고 홍보에 앞세웠다.
이른바 '메인 스트림(Main stream·주류)'. 주의할 것은 선거판의 다수를 뜻하는 '주류'가 아니라 박빙의 선거판을 좌우하는 소수의 '주류', 즉 '메인 스트림'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전통적인 이념과 정강의 고정된 프레임을 벗어나 국민의 요구에 전락적으로 대응해 민심을 얻는 트렌드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제3의 길'로도 이어진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노동당의 전통적 이념과 노선을 버리더라도 국민의 요구에 우선하는 제3의 길을 택했고 집권해서 영국은 물론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EU)와 유럽사회의 정치지형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토니 볼레어의 국민 우선 정치는 영국의 석학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에서 비롯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2002 대선 직전 우리 정치의 '국민 우선'은 어찌 됐을까. 안타깝게도 '선거판을 흔드는 소수의 주류'를 '한국사회의 주류'로 해석하는 듯하더니 대선에서 패배했다. 오히려 당시 상대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고질적인 지역주의와 결합, 충청권 표심을 움직이는 아이러니컬한 '국민 우선' 지역주의 공약으로 대선에 승리했다. 이후 더 큰 갈등과 부작용, 또 막대한 재정과 사회적 소모는 이미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바대로다.
다시 우리 목전의 20대 총선으로 돌아와 보자. 한결같은 '국민' 명분의 탈당과 이합집산 앞에 진정 '국민'은 있는가. 이상하게도 그들이 말하는 '국민'은 통념의 국민과는 달라 보인다.
왜일까.
국민은 다양한 권익과 정책 욕구를 원하며 이를 위해 권리를 위임하고 위임받은 자가 대리한다. 공무담임권이다. 그리고 이를 수행할 대리인을 가려 내세운다. 선거, 또는 투표를 통한 권력의 창출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 권력을 위임 받는 순간, 즉 당선증을 받는 순간 다른 누군가의 통제 아래 소속돼 자신에게 권한을 위임한 '국민'을 위해 섬기고 봉사한다느니 하는 당연한 이야기를 마치 엄청난 선과 헌신으로 포장하듯 떠벌인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일꾼에게 일을 줬더니 주인행세를 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누구 탓이고 무엇 때문인가.
적반하장으로 국민 인식을 탓하기도 하고 법과 제도를 운운하기도 한다. 모두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역사의식이다.
보수나 성장도, 분배나 진보도, 역사의식의 성찰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떤가 제안하고 싶다. 우리 '국민'의 진정한 욕구를 호도하는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 또는 이를 치장하는 '성장'이니 '분배'니 하는 정책, 이 모두를 우리는 이뤄왔고 이뤄가고 있으며 또 이뤄야 하지 않는가.
아시다시피 우리 민주주의는 광복과 함께 서구에서 들어왔다. 대의민주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라는 경제 구조의 정치적 얼굴이기도 하다. 광복과 6.25의 혼란 이후 우리는 세계 유례가 드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제1의 길이었고 경제중흥이었다. 성장의 그늘에 기렸던 민주와 분배를 향한 민주화. 우린 6.10민주화운동을 기억한다. 제2의 길이고 정치중흥 아닌가.
이제 제3의 길이요, 제3의 대한중흥을 열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제3의 길은 갈등과 양극화 해소부터 시작해야 한다. 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 확대 등, 정치 민주화는 꾸준히 진전해왔으나 경제분야의 분배와 민주는 제자리걸음이거나 양극화가 심화됐다. IMF와 리먼 사태를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의 책임이 더 크다. 갈등과 양극화 해소의 궁극적 미래는 평화통일이어야 한다.
또 제3의 길은 저출산 고령화의 난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청년실업과 2030세대의 상대적 빈곤화, 경력단절 여성의 취업과 일자리에서 물러난 50세대의 재취업, 나아가 평생 직업의 미래.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저출산 고령화의 근본적 해법은 난망하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국민 우선'을 외치던 클린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더 거슬러 저 유명한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성론'의 저자 여기에 묻히다"를 묘비명으로 새기기 바랐던 간절한 소망을 기억해야 한다.
20대 총선, 법전 한 구석에 묻혀 있던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2항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새삼 화두다. 반길 일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제3의 길은 국민의 진정한 요구가 경제에 있음을 자각하는데서 시작돼야 한다. '경제'의 어원 또한 '경세제민' 아니던가. 나아가 이참에 우리 정치가 도덕과 감성의 정치경제학으로 나누고 배려하며 국민신뢰까지 회복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그 열쇠는 다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손에 쥐어졌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고 간절히 열망한다면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하지 않았던가.
문학·정치평론가 심상협문학평론가·정치평론가 심상협 <사진제공=심상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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