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동네타임즈]미일 정상회담이 끝나고 발표한 공동성명의 제목은 '미·일 공동비전성명'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태평양전쟁을 치른 적국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미래를 위해 함께 나아가자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당초 두 정상이 한일 과거사 갈등문제를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반면 성명에는 "과거의 적이 부동의 동맹이 된 것이야말로 화해의 힘을 과시하는 모델이 됐다", "양국 관계가 굳건한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전환하기까지는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믿음 속에서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등의 표현이 들어가 있다. 미일 관계 개선 과정을 언급한 것이긴 하지만 한일 과거사 갈등과 관련해 일본 쪽 손을 들어주는 듯한 뉘앙스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동안 아베 정권은 '한국은 과거 집착, 일본은 미래 지향'이라는 논리로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해 왔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미국의 태도가 이렇지는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 4월 말 방한 때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끔찍하다, 쇼킹하다"는 강도 높은 표현으로 일본을 비난했다. 이후 백악관과 국무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공식 면담을 갖기도 했고, 외교정책 고위 담당자들로부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국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발언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하지만,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이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얻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런 도발은 발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말한 것은 미국의 입장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아베 총리가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 에반 메데이로스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건설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역사는 역사가 되게 할수록 이 지역이 더 잘 협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 양국이 더는 과거사를 가지고 다투지 말고 미래를 위해 협력해 나갈 것을 우회적으로 촉구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한국 피로증'을 여실히 보여주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28일 '아산플래넘 2015' 국제관계 포럼 연설에서 "역대 최상의 상태에 있는 한미동맹은 미일 동맹 때문에 약화하거나 주변화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외교적 흐름은 윤 장관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이번 아베 총리의 방미를 통해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동맹국 중 가장 큰 자산은 일본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을 지지한다고까지 했다.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TPP를 통해 안보 경제적으로 사실상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될 미일 동맹은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윤 장관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양립할 수 있으며 제로섬 게임은 아니다"라고 강변하지만 국제 역학관계는 제로섬 게임까지는 아닐지라도 경중(輕重)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한국의 외교적 입지는 확대되기보다는 좁아지는 쪽으로 흐름이 펼쳐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의 과거사 입장 변화는 이런 흐름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외교적 고립'과 같은 극단적 진단은 아닐지라도 '활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임을 인정하고 외교 전략의 기본 방향을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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