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 지 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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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커스뉴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裝)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동양평화협의체를 제안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10일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그리고 빌헬름 신부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16일 뒤인 3월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순국한 지 올해로 106주년을 맞이한다. 안중근 의사는 선각자적인 교육자였고, 고도의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이었다.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해 항일 투쟁한 의병대장이며, 사상가이자,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분이다. 좋은 가정환경에서 어려움없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조국을 위해 살신성인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안 의사와같은 헌신적인 애국심을 요구한다면시대착오적이라고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안 의사가보여준 실천적인 조국애와 민족의식, 국가사랑의 헌신적인 삶에서 우리 자신과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야 할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안중근 의사는 거시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안 의사는 어린 시절부터 개화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전해주는 당대의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평화를 추구해야 할 지식인의 행동을 습득했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의 최종 행동은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단죄한 것이다. 세계에 경중을 울리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안 의사가 평소 대한독립만이 아닌 인류의 평화, 적어도 동양권의 영구한 평화의 길을 강구할 수 있었던 것도 폭넓은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의의는 동양평화를 위한 결단이었다. 안 의사는 그가 집필한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을 통해 명확히 주창하고 있는 '동양평화'라는 원대한 뜻을 심문과 공판과정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 뜻을 세계만방에 알린 평화주의자로 자신의 신념과 의지의 표현에 거침없었다. 나아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일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히리이시와의 면담에서도 동양평화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피력했다. 순국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일본 관리에게 동양평화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미완의 동양평화론이 지니고 있는 사상사적 의미와 역사성은 한국만이 아닌 현재 동북아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아시아인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도 대부분 국가들은 세계평화를 지향하면서도 과거 어느 시대보다 민족주의와 패권주의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인류사에서 무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성공한 역사는 없다. 나폴레옹의 유럽통일의 꿈도, 히틀러의 제국건설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획책도 모두 실패했다. 인류평화를 해치는 범죄행위로 끝났다.
일본은 한국병합에 장애가 되는 안중근 의사같은 독립투사가 다시 나올 것을 막기 위해 안 의사를 극형에 처했다. 안 의사의 묘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안 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 지는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다.
올해는 1946년 김구 선생이 안중근 의사 가묘를 만들어 놓은 지 70주년이다. 일제에 빼앗긴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모시는 일은 그의 유언을 실천함은물론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일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나라를 위한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라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와 관련자료를 찾아야 한다. 유린된 안 의사의 인권과 유족의 환난을 위로하는 일이다.
또 구국의 대의를 이어간 안중근 가문의 유해도 조속한 사료 발굴과 환국해야 한다. 국가가 어려울 때 가족 전체가 살신성인한 독립운동의 가족을 위해 우리 국민과 국가는 책임 있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김월배 다롄 외국어대학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旅顺日俄监狱旧址博物馆) 초빙연구원>1910년 3월10일 중국 뤼순감옥 면회실에서 안중근 의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동생 정근, 공근 형제, 빌헬름 신부(뒷모습)를 만나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있는 모습을 담은 기록사진. <사진제공=김월배 다롄 외국어대학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 초빙연구원>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번째 모자를 벗는 사람)가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 도착한 모습.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되기 전 모습이다. <사진제공=김월배 다롄 외국어대학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 초빙연구원>김월배 다롄 외국어대학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 초빙연구원. <사진제공=김월배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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