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없는 골프 선수…그래도 '은퇴식'은 있다>
(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올해 마스터스골프대회는 조던 스피스라는 새로운 스타 탄생과 타이거 우즈의 부활 가능성, 그리고 노장 필 미켈슨의 분투 등으로 골프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올드 스타 벤 크렌쇼의 은퇴 무대도 큰 주목을 받았다.
올해 63세인 크렌쇼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꾸준한 활약을 펼치면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19승을 따냈다.
특히 43세이던 1995년 마스터스를 제패한 것은 크렌쇼의 골프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크렌쇼는 1995년 마스터스 우승 이후 PGA 투어 대회 정상에 다시는 서보지 못했다.
역대 우승자에게는 평생 출전권을 주는 마스터스지만 올드 스타들은 후배 선수들이 더 많이 출전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출전을 중단한다.
크렌쇼는 올해 대회에 출전하면서 "내년부터 마스터스에 더는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2라운드가 끝난 뒤 팬과 가족, 그리고 많은 후배의 따뜻한 박수 속에 18번홀 그린을 떠났다.
왁자지껄한 은퇴식은 없었지만 18번홀 그린 옆에는 많은 팬이 크렌쇼가 마지막 퍼트를 마칠 때를 기다렸고 TV 카메라도 한동안 크렌쇼가 가족, 팬들과 악수나 포옹을 나누는 모습을 중계했다.
미국과 유럽의 유명 골프 선수들은 이렇게 특정 대회에서 '은퇴 세리머니'를 치르는 일이 많다.
골프의 발상지이자 골프의 '성지'(聖地)로 꼽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골프 링크스의 올드 코스 스윌칸 다리는 이런 '은퇴 세리머니'의 단골 명소이다.
스윌칸 다리는 18번홀 티샷을 한 뒤 페어웨이로 걸어나갈 때 건너는 다리이다. 우승자들이 우승 트로피 클라렛 저그를 들고 꼭 기념 촬영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은퇴하는 골프 선수들은 이곳에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팬들은 이곳에서 이제 필드를 떠나는 노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1995년 아널드 파머, 2005년 잭 니클라우스도 이곳에서 브리티시오픈과 작별했다.
브리티시오픈은 5년마다 올드 코스에서 열리는데 올해는 톰 왓슨과 닉 팔도가 스윌칸 다리에서 '은퇴식'을 할 예정이다.
톰 왓슨은 원래 2010년 대회 때 은퇴 세리머니를 하려 했지만 악천후로 순연되면서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팬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이유로 5년을 기다렸다가 이번에 정식으로 은퇴식을 열기로 했다.
퇴장하는 거물의 뒷모습은 이런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골프 대회의 값어치를 더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한국 골프에서는 이런 은퇴 세리머니는 드물다.
프로 골프의 역사도 짧고 선수층도 두텁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ADT캡스챔피언십 마지막날 18번홀 그린 옆에서 막 경기를 마친 배경은(30)은 꽃다발과 감사패를 받았다.
배경은은 고교 1학년생이던 2001년 한국여자프골프선수권대회를 제패하는 등 투어 통산 3승을 거뒀고 2006년부터 7년 동안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약했다.
결혼해 주부 선수로 1년을 뛴 배경은은 대회에 앞서 "투어 무대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조촐한 은퇴식이 열린 것이다.
배경은은 "다치거나 성적이 형편없어서 하는 수 없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모습은 싫었다"면서 "후배들이 진심으로 은퇴를 축하해주고 팬들이 감사패까지 만들어주니 반가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투어를 그만두는 선수에게는 이렇게 따뜻한 은퇴 세리머니를 베풀어주는 관행이 생기면 좋겠다"는 희망도 덧붙였다.
한국프로골프의 산 증인이라고 할 한장상(74) 한국프로골프협회 고문은 2007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50년 연속이 대회 출전한 그는 대회에 앞서 "내년부터는 출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알렸다.
한국프로골프협회 회장단과 몇몇 후배 선수들이 한 고문에게 화환을 증정하고 노장의 퇴장 현장을 지켰다.
한국에서는 '마지막 출전 대회'에서 꽃다발과 박수를 받으며 은퇴 세리머니를 치른 경우는 두 명 말고는 없다시피 하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김남진 사무국장은 "프로 선수들은 나이가 들어 기량이 떨어지면 조용히 투어 무대를 떠나곤 했다"면서 "앞으로 은퇴하는 선수가 있다면 협회 차원에서 조촐하게나마 그동안 노고를 치하하고 새로운 삶을 격려해주는 자리를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은퇴가 없다'는 골프 종목 특성상 은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길 꺼리는 선수 문화도 프로 골프 선수 은퇴 세리머니가 흔치 않은 이유가 된다.
한국프로골프협회 박호윤 사무국장은 "은퇴를 선언해버리면 사실 퇴로가 없지 않느냐"면서 "어지간한 선수라면 하는 데까지 해보다가 물러나는 게 골프의 특성인데 출전권이 없는 선수는 대회에 출전해서 은퇴 세리머리를 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한국프로골프 최다승 기록 보유자 최상호(55) 전 한국프로골프협회 부회장은 올해도 매경오픈에 출전한다.
그는 평소에 "골프 선수가 은퇴가 어디 있냐"면서 '영원한 현역 선수'임을 자부한다. 은퇴 세리머니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올해 60살인 그레그 노먼도 지금까지 한번도 '은퇴'를 입에 담아본 적이 없다.
두살 아래인 팔도가 올해 브리티시오픈에서 스월킨 다리에 올라 팬들에게 작별을 고하겠다고 예고했지만 노먼은 아무런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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