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유럽서 핵미사일 경쟁 재연?…배경은
1987년 미-소 '중거리핵탄도미사일폐기(INF) 협정' 주목
(서울=연합뉴스) 지일우 기자 =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유럽에서 다시 무기, 나아가 핵미사일 경쟁을 재연하는 듯한 모양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올해 안에 40기 이상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실전 배치할 것"이라면서 특히 "이 미사일은 기술적으로 가장 개량된 미사일 방어(MD) 시스템도 뚫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하루 앞선 15일 미국의 데보러 리 제임스 공군장관은 러시아와의 긴장 고조 상황을 반영해 유럽에 제5세대 첨단 전투기 F-22 랩터를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ICBM은 두말할 것도 없고 랩터 역시 핵무기까지 장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은 16일 "현재 러시아가 직면한 가장 실질적인 위협은 유럽의 군비 배치 공언이 아니라 유럽에 배치되고 있는 MD 시스템"이라고 적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러시아 영토를 위협한다면 러시아는 이런 위협을 야기하는 국가들을 향해 무기를 겨냥해야만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우리 국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이 적시한 MD 위협은 현재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배치되고 있는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뿐만 아니라 독일이 최근 도입하기로 한 '중거리 미사일 방공망'(MEADS·미즈)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미즈는 2025년까지 패트리엇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한 총 사업비 40억 유로(약 5조314억 원) 상당의 방공망으로, 독일이 미국, 이탈리아와 함께 개발에 가세한 무기체계다. 360도 회전하며 목표물을 추적하는 레이더망을 구축, 전투기나 무인항공기는 물론 단거리·순항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패트리엇 체계와 달리 트럭으로도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동 배치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러시아 간 대치 대목에서 특히 눈에 띄는 협정이 하나 있다. 양측이 소련 시절인 1987년 12월 8일 워싱턴에서 체결한 중거리핵탄도미사일폐기(INF) 협정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것이다. 사거리 1천~5천500㎞의 중거리, 사거리 500~1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의 생산과 실험, 그리고 배치를 금지한 것으로, 사실상 중단거리 미사일을 폐기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이나 러시아 입장에서 중단거리 미사일의 사용 대상은 당연히 상대국이 아니라 유럽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시사주간 '아르구멘트이 이 팍트이'(논거들과 사실들. 이하 A&F)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정 50㎞ 미만인 자국의 신형 지대공 미사일 '오카(SS-23)'까지 이 협정 적용대상에 포함시켰고 이 때문에 소련의 군사전문가들은 '범죄에 가까운 실수'라면서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조약은 이듬해 6월1일 발효됐고 양측은 1991년 6월께 협정상의 약속을 완수했다. 소련은 1천846기, 미국이 846기의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한 것이다. 양측은 아직 INF 협정을 폐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 아직 유효한 협정이다.
이달 초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은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가 지난해 7월 실험발사한 미사일이 INF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면서 미국이 유럽에 핵미사일을 다시 배치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A&F가 이와 관련해 군사전문가로, 군사전문 잡지 '우리나라 병기고' 주간인 빅토르 무라홉스키에게 INF에 대해 물었다.
"아직 우리나 미국은 INF에서 탈퇴한다는 공식 선언을 내놓지 않았다. 전문가적 관점에서 러시아가 INF를 준수하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개인적으로도 INF에서 탈퇴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유는 뭘까? "미국의 무인기(프레데터·글로벌호크)는 사실상 이 협정을 위반한 것이다. 현재 미국은 INF 협정에 저촉되는 무인항공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사실상 전략적 탄도(순항) 미사일급 무기로, 우리로서는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이 협정은 단지 미국과 러시아 간 협정일뿐이다. 중국과 파키스탄, 이란 등은 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중단거리)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가 INF를 위반했다며 미국이 비난하는 근거로 두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러시아의 순항미사일인 '이스칸데르-M'의 사거리가 500㎞를 넘어선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러시아가 실험한 ICBM급 탄도미사일 '루베즈'의 사정이 5천500㎞ 미만이라는 점이다."
러시아 역시 나름 미국을 비난할만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 "프레데터와 글로벌호크는 무장이 가능한 무인기로, 500~5천500㎞ 중·단거리 미사일을 규제한 INF 협정에 딱 걸리는 것들이다. 프레데터는 활동반경이 1천~1천500㎞, 글로벌호크는 수천㎞로, 미국이 현재 이들 무기를 세계 곳곳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러시아가 MD에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MD 발사장치는 대함 순항미사일 장치와 완벽히 똑같다. 따라서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순전히 미국인의 양심에 달린 것이다." 여기에 미국은 푸틴 1기 대통령 시절인 2001년, 핵전력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핵전쟁을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1972년 소련과 체결했던 탄도요격미사일(ABM) 협정에서 일방 탈퇴를 선언했다. 양국의 국토 전체를 지키는 MD 시스템을 금하고 수도를 포함해각각두 곳에서만 미사일 수를 100개로 제한하는 협정이었다. 무라홉스키의 진단은 가뜩이나 미국의 이 협정 탈퇴 앙금이 남아있어 보이는 푸틴의 MD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는 배경으로 읽힌다.
결국 INF는 아무런 효용이 없는 협정이라는 게 무라홉스키의 결론이다. "나토의 전투기가 에스토니아에 배치돼 5~7분이면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도달할 수 있고 순항 미사일을 장착한 나토의 함정들이 발트해와 흑해에서 활동하는 이상 이 협정은 '쓸모없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A&F는 이와 별도로 '미국이 러시아 접경 지역에 핵무기를 배치해 놓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입장에서) 관자놀이에 권총이 겨누어져 있는 상태'라는 제목으로 미국과 러시아(소련)간 핵미사일 경쟁 약사를 소개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개한 글이긴 하지만 양측의 갈등 이면을 이해하는 데는 참고가 될 듯하다.
▲소련을 겨냥한 미국의 핵무기 배치 계획은 1945년, 즉 핵무기가 처음 등장한 직후부터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토탤러티(Totality)'로, 그해 말 완성됐다. 소련 20개 주요 도시를 핵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1948년 8월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전쟁과업이 확립됐다. '대(對)소련 관계에서 과제들'이란 비망록에 포함된 것으로, 여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 소련은 군사관계(분야)에서 이웃국가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해져서는 안 된다.
- 소련내 소수민족들에게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해야 한다.
- 경제적으로 외부세계에 의존하도록 해야 한다.
- 새로운 '철의 장막'을 설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 내에 소련을 핵 공격할 수 있는 군사기지 설치가 검토됐다.
▲1949년 소련이 처음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지만 미국은 자체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지 않았다. 1960년께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6천 개에 달했지만 소련은 300개에 불과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터키 이즈미르 지역에 핵탄두를 장착한 15기의 중거리 미사일 PGM-19, '주피터'를 배치했다. 사거리 2천400㎞로, 모스크바를 포함해 소련내 유럽 전 지역이 10분 내 타격권에 들어갔다.
▲소련은 이에 대응해 '아나디리'(추코트카주에 있는 러시아의 가장 북동쪽 마을) 작전을 전개했다. 쿠바의 자유의 섬에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쿠바 위기'의 시작이었다.
▲1979년 나토는 유럽 내에 500기 이상의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이 중거리 미사일 SS-20, 즉 '피오네르'를 전개한 데 따른 대응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취임한 뒤 소련이 피오네르를 폐기하면 미국 역시 유럽 내 미사일 배치계획을 철회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사건으로 상황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미국의 핵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에 핵미사일이 배치됐고 독일(서독)에도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소련은 이에 맞서 체코와 동독에 핵미사일을 전개했다. 1987년께까지 서독에 108기의 '퍼싱-2' 미사일과 64기의 '토마호크', 영국에 112기의 토마호크, 이탈리아에 112기, 네덜란드에 16기의 미국 미사일이 배치됐다.
▲1987년 12월 8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레이건 대통령은 '중거리핵탄도미사일폐기(INF) 협정'을 체결했다.
▲2000년 미국이 소련과 체결했던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 탈퇴를 선언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INF 탈퇴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러시아가 SS-26, 즉 이스칸데르 전술 미사일을 실전 배치한 이후 미국은 지속해서 러시아가 INF를 위반했다고 비난해왔다. 러시아 국방부는 2018년까지 육군이 보유한 모든 지대공 미사일을 이스칸데르로 대체할 계획이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터키에는 현재도 총 150~250기, 도합 18메가톤 규모의 미국산 전술핵무기가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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