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출신 나치 전범 사망…러시아의 뒷북?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6-01 17: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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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앞두고 송환 요청…캐나다 '거부'


우크라이나 출신 나치 전범 사망…러시아의 뒷북?

사망 앞두고 송환 요청…캐나다 '거부'



(서울=연합뉴스) 지일우 기자 = 러시아가 얼마전 승전 7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2차 세계대전 전범으로 규정, 캐나다에 송환을 요청했던 '우크라이나의 도살자' 블라디미르 카트륙이 지병으로 94세를 일기로 숨졌다.

카트륙의 변호사 오레스트 루드직은 지난달 28일 그가 캐나다 몬트리올 인근 자택에서 지병으로 며칠전 숨졌다고 말했다.

카트륙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3년 3월 22일 벨라루스 민스크주 로고이스크 지역에 있는 하틴 마을 주민을 몰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는 인물이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러시아 시사주간 '아르구멘트이 이 팍트이'(논거들과 사실들. 이하 A&F)와 모스콥스키 콤소몰례츠(이하 MK)지 등에 따르면 카트륙은 학살 당시 나치 독일의 포로가 된 뒤 독일로 전향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 또는 소련의 노동자농민 적위대 출신 인물로 구성된 제118 나치 경찰대대 소속이었다.

이 부대는 75명의 어린이와 미성년자를 포함한 149명의 하틴 마을 주민을 모두 한 헛간에 가둬놓고 불을 지른 뒤 뛰쳐나오는 주민들을 모두 사살했다고 한다. 민가는 모두 불태웠다.

이런 사실은 당시 118부대 참모장이었던 그리고리 바슈라와 소대장 바실리 멜레시코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소련 적위대 중위 출신인 멜레시코는 2차 대전후 소련 특수기관의 추적 끝에 1970년대에 체포돼 1975년 총살됐다. 역시 적위대 상급중위 출신이었던 바슈라는 1980년대 중반 당국에 사로잡혀 1986년 11∼12월 벨라루스 전범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돼 역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카트륙이 하틴 마을에서 직접 헛간에 불을 지르고 뛰쳐 나오는 주민들을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소련 시절 비밀에 부쳐졌다가 벨라루스 국립문서보관소가 2009년 발간한 '하틴, 그 비극과 기억'이란 문서집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고 한다. 이 문서집에는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도 담겨있다.

나치의 하틴 마을 만행은 1943년 같은 달 마을 인근에서 독일군이 게릴라로부터 매복공격을 당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이자 히틀러와도 친분이 있는 한스 벨케 대위 등이 사살당한데 따른 보복인 것으로 알려졌다.

카트륙은 종전이 된 1945년 프랑스군 포로가 돼 교화소에서 몇년 살다가 1951년 캐나다로 망명해 정착, 몬트리올 인근에서 양봉업을 해왔다고 한다.

나치 전범을 추적해온 이스라엘의 '시몬 비젠탈 센터'는 바슈라 중위 등의 증언이 담긴 문서집이 나온 뒤인 2010년대 초 카트륙을 최우선 수배인물 중 한명으로 규정했다.

카트륙은 앞서 1999년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캐나다 시민권을 박탈당하기도 했지만 캐나다내 우크라이나 이민자 사회의 청원으로 10년 뒤 완전히 복권됐다. 당시 캐나다 당국은 하틴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한다.

러시아 사법당국은 승전 70주년을 즈음해 지난달 중순 '뒤늦게' 카트륙을 '집단학살' 혐의로 정식 기소하는 한편 캐나다 측에 송환을 요청했다.

알렉산드르 즈뱌긴체프 러시아 법무차관은 카트륙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기 바로 며칠전 이 같은 요청이 캐나다 당국에 의해 거부됐다고 밝혔다고 MK는 전했다.

우크라이나 이민사회는 러시아의 이번 요청에 대해서도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으로부터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리고 캐나다 내 소수민족 사회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면서 캐나다 당국에 송환을 거부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티븐 하퍼 캐나다 정부 역시 송환 거부 사유로 "크림병합과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목격자는 MK에 "러시아 정부는 왜 카트륙이 캐나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16년 전(1999년) 그 도살자를 기소해 송환을 요청하지 않았나?"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변이 없지만 멜레시코와 바슈라에 대한 문서가 2009년에야 공개됐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소련, 더 나아가 러시아가 하틴 마을 학살 사건 또는 바슈라 등 전범을 비호해 온 것 아니냐는 의혹인 셈이다.





하틴에 세워져 있는 당시 학살 추모비는 한 남성이 죽은 소년을 두팔에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 남성은 확인사살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인 대장장이 이오시프 카민스키를 형상화한 것으로, 두팔에 안긴 소년은 자동 소총에 맞아 숨진 그의 아들이다. 카민스키는 숨진 아들 옆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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