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거문화를 바꾼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3-26 08: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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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걸 한샘 창업주, 연구재단에 4천400억원 출연 (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 조창걸 한샘 창업주가 한국의 미래를 개척할 전략을 개발하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사재 4천400억여원을 공익재단에 출연한다. 한샘은 26일 조창걸 명예회장이 '재단법인 한샘드뷰 연구재단'에 한샘 지분 60만 주를 기부했다고 공시했다. 이는 25일 종가(17만6천원) 기준으로 1천56억원에 해당하는 규모다. 조 회장은 이를 시작으로 200만 주(약 3천400억원)를 추가로 출연해 자신이 보유한 한샘 주식 534만 주 중 절반인 260만 주를 재단 운영에 내놓을 계획이다. 2015.3.26 << 한샘 제공 >> engine@yna.co.kr

한국의 주거문화를 바꾼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



(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 한국판 '브루킹스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26일 사재 4천400억여원을 출연하기로 한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은 국내 주거문화를 바꾼 선구자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39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다 1970년 한샘을 창업했다.

당시는 국내 부엌 문화가 아궁이에서 싱크대로 막 옮아가던 시기로, 밥을 하기 위해 신발을 신고 방을 나가 허리를 굽혀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부엌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안방과 거실 등 다른 주거 공간과 높이가 같아지는 때였다.

이에 한국에서도 서구처럼 입식 부엌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을 직감한 조 회장은 대학 동창인 김영철 전 퍼시스 회장과 함께 연신내에 20여㎡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부엌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샘은 순 우리말로 커다란 연못 속에서 샘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난다는 뜻이다.

조 회장의 예감은 적중했다.

1970년대 중반 여의도 시범 아파트 단지와 반포 아파트 등 아파트 개발 붐이 일면서 한샘 가구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잇달아 분 국내 건설사들의 중동 진출 붐도 한샘 성장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 결과 1983년 한샘은 수출 500만 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국내에 도마장, 쌀통장, 행주걸이장 등 수납장을 더한 시스템 키친을 소개하고 사업 영역도 B2B에서 B2C로 확장하면서 기업 규모를 키웠다.

1997년에는 사업 영역을 부엌 가구에서 인테리어로 과감하게 넓혔다.

단순히 부엌 가구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거실장, 소파, 커튼 등을 포함한 거실 자체로 판매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신도시가 건설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사람들이 아파트 인터레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0년대 후반은 IMF 구제금융을 받던 시기였지만 한샘은 적확한 판단 덕분에 오히려 기업 규모를 매출 1천억원대에서 4천억원대로 4배 늘릴 수 있었다.

이후 한샘은 꾸준하게 성장해 2013년 매출 1조원을 달성하는 등 국내 대표적인 인테리어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현재는 건자재 시장에 진출해 다시 한 번 도약을 꿈꾸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최양하 현 회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현재는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난 조 회장은 앞으로는 서울 원서동에 있는 한샘드뷰 디자인센터로 출근하며 한샘드뷰 연구재단 이사장으로서 재단 운영에 전념할 계획이다.

재단 관계자는 "조 회장은 평소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세계적인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이 미래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말해왔다"며 "한샘드뷰 연구재단이 한국의 미래 전략을 개발하고 리더를 양성하는 곳이 되도록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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