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습자 가족 "내 가족을 못 찾을까봐 무섭습니다"
동거차도에서 24시간 맹골수도를 지켜보는 아빠들
세월호를 잊으려는 사람들, 잊지 않기 위해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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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항 가는 길에 걸린 노란 현수막 |
(진도=포커스뉴스) 서울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거리는 약 420㎞다.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6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지난 11일 방문한 진도의 모습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4월의 진도는 곳곳에 꽃이 피었지만 2년 전 차가운 맹골수도에 가라앉은 아홉 명의 꽃은 아직도 피어나지 못했다.
◆ 미수습자 가족들 "내 가족을 못 찾을까봐 무섭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현장인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를 건너면 팽목항까지 벚꽃터널이 이어진다.
벛꽃터널 너머로는 만개한 유채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팽목항이 가까워질수록 노란 유채꽃은 '세월호 온전한 인양!'이라고 적힌 노란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2년 전 자식을 찾는 가족들과 그들을 취재하는 취재진들로 가득 찼던 팽목항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곧바로 컨테이너 가건물로 만들어진 팽목 분향소로 향했다.
매캐한 향냄새 사이로 비발디의 '지크프리트 베렌트(Siegfried Behrend)'가 흘러나왔다.
제단 위에는 과일과 나물 대신 과자와 탄산음료, 바나나우유 등이 올라와 있었다.
분향소 옆에는 미수습자 가족들이 머무는 컨테이너 건물 10여동이 있다.
그곳에는 단원고 미수습자 조은화양 부모님 조남성(54)·이금희(47)씨와 단원고 희생자 진윤희양 삼촌인 '팽목항 지킴이' 김성훈(41)씨가 있었다.
은화 엄마 이금희씨는 하루 전 날 있었던 이야기를 기자에게 했다.
"방파제에 6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오시더니 '이제는 잊을 때도 되지 않았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주머님, 아주머님의 자식이 저 차가운 바닷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어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라고요."
은화 엄마는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세월호 2주기는 2년의 세월이 지난게 아니고 2014년 4월 16일이 727일, 728일째인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 삼촌 김성훈씨는 "지금은 온전히 자식을, 그리고 가족을 찾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 관심이 사라지고 정치권에서 신경 쓰지 않으면 세월호는 올라오지 못해요. 지금은 논란을 만드는 것보다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에 모든 힘을 실어줘야 해요. 왜냐하면 배가 인양이 돼야 진실이 밝혀지는 거거든요."
누구보다 단단하고 누구보다 강했던 미수습자 가족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다. 만에 하나라도 내 가족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
은화 엄마는 "'내 가족을 못 찾을까봐 무섭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미수습자 가족들의 마음"이라고 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내년 3주기는 희생자 295명에 미수습자 9명도 돌아와 304명을 온전히 추모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그게 우리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동거차도를 지키는 아빠들 "인양되는 그날까지 지켜볼 것"
12일 오전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선체인양 실지조사가 예정돼 있었다.
진도 VTS(해상교통관제시스템)가 있는 서망항의 물살은 잔잔했지만 미수습자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은화 아빠와 윤희 삼촌은 "이제는 여기서도 맹골수도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며 "아마 바지선에 접안하는 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오전 8시 45분쯤 해경의 인원점검이 끝나자 특조위와 가족들, 그리고 기자들을 태운 배는 맹골수도를 향해 떠났다.
서망항을 떠난 지 10분쯤 지났을까. 잔잔했던 바다는 어느새 3m가 넘는 파도가 치는 거센 바다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멀미약을 먹었음에도 멀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거친 파도를 뚫고 1시간을 달려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은화 아빠와 윤희 삼촌의 말대로 파도는 거셌다.
이로 인해 결국 인양작업을 하는 바지선 상하이샐비지 다리호(大力號)에는 접안하지 못했다. 특조위원들과 유가족들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뱃머리는 사고현장에서 1.7㎞ 떨어진 동거차도로 향했다. 그곳에는 세월호 인양작업을 감시하고 있는 단원고 희생학생의 아빠들이 있다.
동거차도 선착장에 내려 산길을 따라 20분쯤 걸어 올라가자 아빠들이 있는 돔형텐트 3동이 나타났다.
성인남자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거센 바람이 하루 종일 부는 그곳에서 아빠들은 지난 해 9월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양작업을 감시하고 있다.
아빠들은 반별로 돌아가며 세 명씩 조를 짜 일주일동안 동거차도에 머문다고 했다. 이날은 2학년 3반 아빠들 차례였다.
텐트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바지선을 바라보던 단원고 희생자 최윤민양 아빠 최성용(55)씨는 "어떻게 하면 인양하는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동거차도가 그나마 가장 가깝게 볼 수 있겠다고 판단해 이곳에 자리잡게 됐다"고 말했다.
윤민 아빠를 비롯한 희생자 아빠들은 이곳에서 바지선이 움직이는 모습, 외부에서 사람들이 다니는 모습 등을 카메라로 지켜보고 있다.
윤민 아빠는 "바지선에서 인양작업을 참관했다면 자세히 볼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공정대로 잘 이뤄지고 있는지 100%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이곳에 있는 아빠들의 걱정은 인양작업이 낮이 아닌 밤에 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윤민 아빠는 "낮에는 워밍업만 하고 밤이 돼야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며 "처음에는 크레인이 바로 보여 작업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가족들이 감시하자 크레인을 남쪽으로 틀어 일하는 장면이 안 보인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단원고 희생자 김소연양 아빠 김민철(55)씨는 "이곳에 있으면 아이들이 배 안에서 이곳 육지와 주변을 맴돌던 해경을 바라보고 있었을 시점이 떠오른다"며 "당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단원고 희생자 박예슬양 아빠 박종범(49)씨는 만약 살아있었으면 13일 첫 투표를 했을 딸을 떠올렸다.
예슬 아빠는 "아마도 매우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투표를 했을 거다"라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알아본 다음 투표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이들은 국민들이 믿을 수 있게 제대로 인양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지가 걱정된다고 했다.
윤민 아빠는 "인양되는 그날까지 지켜볼 것"이라며 "인양 후 선체 내부 수색까지 참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거차도를 지키는 아빠들은 성함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결같이 "나는 이름이 없다"며 아이 이름을 말했다.
세월호가 인양되는 그날, 아니 그 이후에도 이들은 최성용씨, 박종범씨 등이 아닌 윤민 아빠, 예슬 아빠 등으로 남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팽목항과 세월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
2014년 4월 16일 이후 팽목항은 세월호 희생자와 미수습자 가족들, 그리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됐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팽목항은 진도를 대표하는 '진도항'이었고 주말이면 관광버스가 20대씩 들어오는 유명 관광지였다.
전 국민이 추모하고 기억하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달려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팽목항에서 매점을 하는 60대 김모(여)씨에게 세월호는 잊고 싶은 기억이다.
특히 어두운 밤에 노란 리본이 펄럭거리는 걸 보면 깜짝 놀란다고 했다.
김씨는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바뀌었다"며 "주말마다 관광버스가 20대씩 왔었는데 세월호 이후 뚝 끊겼다"고 하소연했다.
물론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유가족도 있다"며 "이제는 다른 유가족들도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했다.
비난의 화살은 정치권에게도 돌아갔다.
김씨는 "진도군은 정부에서 지원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으니 답답하다"며 "군수라도 나서서 정부에서 지원금을 뽑아와야 되는데 가만히 있다"고 말했다.
진도에서 개인택시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진도 군민들에게 세월호와 팽목항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팽목항과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요새는 다들 일상에 집중하기에도 바쁘다"고 말했다.
또 "예전에는 팽목항으로 가자고 하는 외지인도 많았는데 요새는 그런 사람도 많이 줄어들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가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팽목항에는 다시 4월이 돌아오면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발길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언니들과 함께 팽목항을 찾았다는 김연(63·여)씨는 "나도 엄마인 입장에서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며 "다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이었는데…"하면서 말을 흐렸다.
김씨는 "자식이 먼저 죽는 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며 '이제는 잊어야 한다'는 여론을 비판했다.
세월호 2주기를 맞아 광주에서 왔다는 한용근(59)씨는 "팽목항은 생명의 소중함과 가족의 사랑을 느끼는 곳이 돼야 한다"며 "4·19와 5·18처럼 4·16도 역사책에 남아 우리의 잘못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팽목항에서 만난 그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저 비극적인 참사를 목격한, 그리고 그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세월호 온전한 인양!'이라고 적힌 노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16.04.11 정상훈 기자 전남 진도 팽목항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 2016.04.11 정상훈 기자 팽목항에 미수습자들이 온전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16.04.11 정상훈 기자 저 흐린 바닷물 속에 세월호와 9명의 미수습자가 있다. 2016.04.12 정상훈 기자 동거차도 텐트에서 윤민 아빠 최성용(55)씨가 세월호 인양작업을 지켜고보 있다. 2016.04.12 정상훈 기자 단원고 희생학생 아빠들이 머무는 동거차도 텐트 안에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2016.04.12 정상훈 기자 진도 팽목항 방파제 등대에 노란 리본이 그려져 있다. 2016.04.12 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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