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고 무시당하지만 후보자에 대한 핵심 정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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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창화명함.jpg |
(서울=포커스뉴스)
[3월 27일 오후 3:23]
"이름을 더 크게 합시다"
"아니, 기호를 더 크게 합시다"
"후보 얼굴이 잘 나와야죠"
20대 총선 후보등록 마감 이튿날인 26일선거 캠프 회의실이 소란스럽다. 후보자 확정 이후 새로 찍을 명함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의견을 주고 받는다.
시민들의 눈에는 국회의원 후보자 명함이 다 비슷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군인이 군복 상의 주름을 몇 줄로 잡건 민간인들이 보기엔 다 같은 군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후보들에겐 다르다. 한 장의 명함을 뽑기 위해 후보자 이름 크기, 사진 위치, 약력의 글씨 색깔 등 아주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도 몇 시간 동안 토론을 하는 것이 다반사다.
서울 노원구병 더불어민주당(더민주) 황창화 후보는 이 달에만 벌써 세 번 명함 디자인을 바꿨다. 선거 구호와 사진 위치, 글씨체 등을 계속 새롭게 했다.
황 후보 선거사무실 관계자는 "명함이 유권자에게 가장 손쉽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홍보물인 만큼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계속 디자인을 개선한다"고 말한다.
유권자 특성에 맞춰 명함을 뽑기도 한다. 서울 노원구을 새누리당 홍범식 후보는 평범한 디자인의 '직장인용', 파스텔톤으로 벚꽃이 그려진 '대학생용', 대통령과 함께 한 사진이 있는 '어르신용' 등으로 구분해 인쇄를 하기도 했다.
[3월 28일 오전 10:07 ]
"철컥, 철컥, 촤르르르…"
명함 디자인이 끝나면 인쇄에 돌입한다. 28일 서울 을지로의 한 인쇄소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서울 동대문구갑 새누리당 허용범 후보 사무실에서 명함 10만장을 한 번에 찍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선거 캠프 관계자들은 선거운동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예비후보자 시절에도 하루에 명함 1000장을 돌리는 건 다반사라고 입을 모았다.
허 후보 캠프 홍보담장자는 "한 박스(1만 장)도 금방 돌아보면 어느 새 비어 있다"며 "거의 2~3일마다 수시로 주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번에 만 장은 소규모죠."
인쇄를 지켜보던 기자에게 인쇄소 직원이 다가와 말해준다. 본 선거에 들어오면서 2~3만장, 많게는 10만장까지 한 번에 인쇄를 한다는 것이다.
인쇄가 끝나면 명함은 1~2시간 잉크로 젖은 몸을 말리고 재단기에 들어가 몸을 가지런히 한다. 재단기에서 선거관리위원회 규정 크기인 9x5cm 규격으로 물린 재단기 칼날이 철컹 하고 떨어지면 후보자 손에 들어갈 명함이 탄생하게 된다.
몸값은 장당 4~5원. 수입지를 쓰거나 코팅이 많이 들어가면 장당 20~30원까지도 값이 오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후보들은 명함의 질보다 빠른 시간에 많은 양을 뿌리길 원하기 때문에 저렴한 '양면 4도 컬러 명함'을 주로 찾는다.
[3월 28일 오전 11:34]
재단이 끝나자 인쇄소 입구가 소란하다. 명함을 배달하기 위한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이미 시동이 걸려있다. 명함이 든 상자를 전달받자마자 퀵서비스 기사가 출발한다.
"선거철 들어서 명함 발송 건이 종종있다" 퀵서비스 기사 이근재(43)씨가 최근 상황에 대해 말했다. "대부분 명함은 제작 끝나면 주문자가 인쇄소 들러서 찾아가는데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퀵서비스를 통해 받는 경우가 있다"며 "받는 즉시 명함을 돌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3월 28일 18:10]
"안녕하십니까, 동대문 새누리당 허용범입니다"
"반갑습니다, 동대문 더민주 안규백입니다"
"안녕하세요, 동대문 국민의당 김윤입니다"
28일 서울 동대문구(갑) 선거구에서는 새누리당 허용범, 더민주 안규백, 국민의당 김윤 후보가 잇달아 유권자들에게 명함을 전했다.
새누리당 허용범 후보는 청량리역 3번 출구에서, 더민주 안규백 후보는 회기역 2번 출구 앞에서, 김윤 후보는 제기동 약령시장에서 시민들을 만났다.
후보는 달랐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많은 시민들이 명함을 전달하는 후보의 손을 무시하며 지나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명함 전달을 피해 걸어간 시민 A씨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선거철만 되면 나눠주는 명함일 뿐"이라며 "이때만 반짝하지 평소에 시민들에게 관심이나 가졌나"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받자마자 명함을 땅에 떨어뜨리는 시민도 있었다. 명함을 받자마자 주변 쓰레기 봉투에 넣은 시민 B씨는 "주니까 받기는 했는데 크게 관심없다"며 "이번 선거 때 투표도 할 생각이 없다"고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후보자에게 받은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는 시민도 있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김규태(35)씨는 "그래도 국회의원 후보가 준 명함인데 버려도 나중에 한 번 보고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무것도 모르고 투표하기보다 어느 당에서 누가 나왔는지 정도는 아는 게 시민의 의무"라고 선거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
[3월 29일 06:32]
"선거철만 되면 명함으로 난리죠"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앞 거리에서 청소 중인 환경미화원 C씨의 말이다. "요즘같은 선거철에 학교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 대상으로 명함 나눠주는 일이 잦다"고 한다.
선거 명함때문에 청소량이 늘어 힘들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C씨는 "시민들이 명함을 읽어볼 자유도 있지만 버릴 자유도 있죠. 중요한 건 선거를 위해 만들어지는 명함인데 버려도 최소한 읽고 버렸으면 좋겠다는 겁니다"고 답했다. 우문현답이었다.
29일 기준 서울 각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는 모두 205명이다. 205명의 후보들이 하루 1000장씩 명함을 돌린다고 치면 하루 20만장의 명함이 서울 시내에 뿌려지는 셈이다.
후보자 명함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정보가 있다.
이름, 약력, 가치관이 담긴 구호. 투표 전 명함만 보고 가도 최소한 이 사람이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당선되면 어떤 비전을 가지고 법안을 만들지 간단히 알 수 있다.
후보자 명함이 시민의 손에 들어가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하루살이가 될지, 선택의 갈림길을 비춰줄 반딧불이 될지는 유권자의 손에 달렸다.(서울=포커스뉴스) 황창화 서울 노원구(병)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후보자 명함. 위에서 아래 순서로 디자인이 바뀌었다. 김대석 기자. (서울=포커스뉴스) 홍범식 서울 노원구(을) 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자 명함. 왼쪽부터 '직장인용', '대학생용', '어르신용' 명함이다. 김대석 기자. (서울=포커스뉴스) 총선을 16일 앞둔 28일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인쇄소에서 총선 예비후보의 명함 인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16.03.28 이승배 기자 (서울=포커스뉴스) 28일 오전 11시 34분, 서울 을지로 인쇄거리에서 만들어진 명함을 퀵서비스 기사가 오토바이에 싣고 있다. 김대석 기자. (서울=포커스뉴스) 28일 오후 6시, 동대문구 각지에서 후보자들이 명함들 돌리며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오른쪽부터 서울 동대문구(갑) 새누리당 허용범 후보, 더불어민주당 안규백후보, 국민의당 김윤 후보. 김대석 기자. (서울=포커스뉴스) 29일 오전 6시, 환경미화원이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앞 거리에 버려진 후보자 명함을 치우고 있다. 김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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