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마지막까지 옷 만드는 회사로 남을 것"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8-17 09: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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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랜드, 27년째 자체 브랜드로 국내서 의류 직접 생산 고집
곽국민 대표 "위기는 곧 기회…과감한 자동화로 노동집약산업 한계 극복"


"한국에서 마지막까지 옷 만드는 회사로 남을 것"

파크랜드, 27년째 자체 브랜드로 국내서 의류 직접 생산 고집

곽국민 대표 "위기는 곧 기회…과감한 자동화로 노동집약산업 한계 극복"



(부산=연합뉴스) 이영희 기자 = "솔직히 우리라고 외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할까 하는 생각이 없었겠어요. 외국 바이어들의 요구도 있었고… 그러나 자체 시장이 없으면 영원히 외국 바이어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국내에 남아서 내수 시장을 공략하기로 결심했죠."

파크랜드는 올해로 27년째 자체 브랜드로 국내에서 직접 신사복 등을 만들어 파는 종합 패션업체다.







재벌그룹 계열의 대기업들이 국내외 봉제업체에 맡겨 옷을 만드는 것과 달리, 파크랜드는 우리 국민이 입을 옷은 우리 땅에서 우리가 직접 만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마지막까지 옷 만드는 회사로 남겠다"는 창업주 이병걸 회장의 소신 때문이다.

1973년 태화섬유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파크랜드는 이브생로랑, 피에르가르뎅, 지방시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주문을 받아서 셔츠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수출하던 소규모 봉제업체에서 국내 1위 신사복 업체로 성장한 회사다.

1970~80년대 부산에는 싼 임금과 많은 인구를 토대로 신발과 봉제산업이 발달했다.

1987년부터 산업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치고, 근로자들의 임금이 급상승하자 그동안 낮은 임금을 토대로 발전해온 봉제산업은 위기에 맞닥뜨렸다.







파크랜드 대표이사인 곽국민 부회장은 17일 "이미 동남아국가 등에 비해 높은 임금 등으로 우리 봉제산업이 사실상 경쟁력을 잃은 상태에서 인건비가 일시에 50%나 올라 더는 공장을 운영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미 우리보다 규모가 큰 봉제업체들이 속속 중국 등지로 떠났거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봉제업체처럼 생산시설을 인건비가 싼 나라로 옮기라는 바이어의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했다.

이미 대기업들이 비싼 로열티를 주고 도입한 외국 유명 브랜드를 앞세워 장악한 내수 시장에, 그것도 자체 브랜드로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외국 유명 패션업체들의 주문을 받아서 납품하는 방식으로는 더 발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체 시장을 확보하지 않으면 늘 외국업체에 끌려 다녀야 하고, 그들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회사를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곽 부회장은 자체 브랜드 '파크랜드'를 만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의 까다로운 품질기준을 충족시켜왔던 만큼 기술력 하나만은 자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대기업 브랜드와 맞붙어 이길 수는 없었다. 이미 몇몇 업체가 그런 실패를 겪는 과정을 지켜본 터였다.

"그래서 우리는 백화점 제품보다 높은 품질의 옷을 재래시장보다 싸게 팔기로 방향을 잡았다"고 그는 소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셔츠와 바지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른바 '틈새시장'을 정확하게 찾아내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소개했다.

민주화 영향으로 근로자들의 임금이 급등한 것이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기회'가 됐다고 곽 부회장은 말했다.

임금이 올라 근로자들의 지갑이 그전보다 두둑해지면서 소비가 덩달아 늘었고, 특히 중저가 상품이 그 혜택을 톡톡히 봤다는 것이다.

곽 부회장은 "임금 상승으로 인한 원가 압박을 단순히 위기라고만 생각했다면 결국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임금 인상이 내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덕에 과감하게 수출을 포기하고 내수시장에 뛰어들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셔츠와 바지로 내수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파크랜드는 1992년에 남성 정장 생산에 나섰다.

정장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셔츠를 생산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토대로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신생 업체가 대부분 타사의 전문인력을 영입해 그 경험을 활용하는 것과 달리 철저하게 자체 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곽 부회장은 소개했다.

"기존 전문인력에 의존하면 이미 시장에 나와있는 신사 정장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완전히 새롭고 과감한 생산 시스템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파크랜드는 과감한 생산설비 자동화, 기계화로 노동집약적인 의류산업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다른 업체들이 엄두를 못 내는 고가의 첨단장비들을 과감하게 도입해 종전에 사람 손으로 하던 공정들을 자동화했다.

스스로를 '봉제 기술자'라고 부른다는 창업주 이병걸 회장은 내수시장에 진출한 이후 2년마다 독일에서 열리는 봉제 분야 기계전시회를 빼놓지 않고 찾아가서 최신 설비를 도입하고, 원하는 기계가 없으면 주문해서까지 들여오고 있다.







원단을 재단하고, 셔츠에 주머니와 단추를 달고 등판을 다림질하는 등 사람이 많이 필요한 작업들을 자동화된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사람을 덜 쓰면서도 공정에 따라서는 생산성이 20배 이상 높아졌다.

기계화로 인건비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원가를 낮춰 다른 브랜드 정장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내놓자 소비자들이 즉각 반응했다.

당시 파크랜드 제품의 특징을 잘 살린 광고문구 '좋은 옷 좋은 가격'은 곽 부회장이 직접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좋은 옷의 정의를 '남이 봤을 때 보기 좋고 내가 입어서 편한 옷'이라고 내렸다.

파크랜드 브랜드 성공에 힘입어 1998년 6월에는 회사 이름을 아예 주식회사 파크랜드로 바꿨다.







2001년부터는 제이하스, 카브리니, 보스트로 등 신사복 브랜드를 추가로 내놨고 2005년과 2009년에는 '프렐린'과 'PL스포츠' 브랜드로 여성복과 아웃도어에도 진출했다.

이 회사는 국내 대형 신사복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국내 공장에서 직접 옷을 만든다.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 공장을 세우거나 하청을 줘서 더 싸게 옷을 만들어 들여올 수도 있지만 3곳의 공장에서 직접 정장과 셔츠 등을 만든다.

유통비용을 줄여 싼 가격에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비싼 수수료를 내야 하는 백화점에는 매장을 내지 않는다.

전국에 직영점 40여 개를 포함해 모두 680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국내 신사복 브랜드 가운데 생산물량과 판매액 모두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내수 부진으로 의류업체들이 고전하고 있지만 이 회사는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곽 부회장은 "셔츠를 주문자상표 방식으로 수출할 때는 부가가치가 낮아 투자할 여력이 없었지만, 내수시장에서 성공하면서 본격 투자로 생산성 향상을 이루고 이익을 다시 투자하는 선순환구조를 만든 것이 오늘의 파크랜드를 있게 했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이 입을 옷은 국내에서 만든다'는 파크랜드의 철학은 고용에도 이어져 5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외국인은 한 명도 없다.

"기업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고용 창출인데 임금 좀 아끼려고 외국인을 채용할 수는 없지 않나?"고 반문했다.

이 회사는 생산성 향상으로 발생한 이윤을 직원들의 작업환경 개선에 투입하고, 대학과 협력해 '기업 MBA' 과정을 운영하는 등 교육과 복지 향상에 애쓴 덕에 창사 이후 단 한 번도 노사분규가 발생하지 않았다.

곽 부회장은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의류산업이 발전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며 "모든 의류업체가 한국을 떠나도 우리는 끝까지 남아서 우리 국민이 입을 옷을 직접 만드는 회사로 남고, 나아가 세계적인 패션업체로 발전하려고 애쓰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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