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옥 지사 "나라 없는 설움 커…제 나라가 가장 좋다"
중국서 독립운동 투신…"통일을 이뤄야 강한 나라 돼"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나라 없는 설움이 무척 큽니다. 중국 애들이 '망국노'라고 놀려서 싸우고 했지요. 제 나라가 가장 좋습니다."
12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독립을 향한 여성영웅들의 행진' 특별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 여성 독립운동가 오희옥(89) 지사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배경에 관한 물음에 "나라를 찾으려고 그랬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모두 248명. 이 가운데 오 지사를 포함해 총 4명 만이 생존해 있다.
오 지사는 1939년 당시 14살의 나이로 중국 유주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 일본군 정보 수집과 한국인 사병 탈출을 도왔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오 지사는 가족 3대가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오 지사는 "이유도 몰랐다. 어른들 따라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면서도 "우리나라가 없으니 나라를 찾으려고 했다. 나라 없는 설움이 무척 크다. 중국 사람들도 우리나라가 나라 없는 노예라고 '망국노'라고 놀려 싸웠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오 지사의 할아버지인 오인수 의병장은 일제 시대 의병활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아버지인 오광선 장군은 만주로 이주해 독립군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8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오 지사의 어머니는 "하루에 밥을 열두 가마씩 해서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 여장군"이었다고 오 지사는 말했다.
오 지사는 2살 많은 언니와 함께 극단에서 항일 공연을 하며 독립운동에 발을 들였다.
한국 포로가 있는 포로수용소 위문, 거리선전 등을 벌여 항일투쟁을 독려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일본군 정보 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 탈출을 돕는 것 등으로 역할을 넓혀 나갔다.
아버지가 체포돼 모진 옥살이를 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두렵지 않았다고 오 지사는 말했다. 오히려 제대로 맡은 소임을 못해낼 때 가장 힘들었다고 오 지사는 털어놨다.
"당시 편지 전달이라던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가장 속상했지요."
오 지사는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도 없었다"면서 "여성도 나이가 차면 광복군에 들어가 훈련받고 최전방으로 갔다"고 말했다.
오 지사는 백범 김구 선생을 붓글씨를 알려준 자상한 분으로 기억했다.
"내가 심심하면 붓글씨를 썼는데 김구 선생이 내가 글 쓰는 걸 보고 팔꿈치를 붙이지 말고 들고 쓰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지금도 그때 배운 대로 계속 씁니다."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한 그에게 광복 소식이 전해진 순간은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광복군 제2지대, 제3지대, 제5지대까지 갔다가 해산이 됐습니다. 일본놈들이 항복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오 지사는 소원인 광복은 이뤘지만 아직 아쉬움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통일이 이뤄지지 않아서다.
"통일이 돼야 강한 나라가 되지요. 우리가 분단돼 있으니 일본이 얕보는 겁니다. 하루빨리 평화 통일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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