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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 |
'암살' 의열단을 이끌었던 류자명 선생을 기억하다
류자명 서거 30주기 학술세미나…항일 아나키스트 재조명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영화 '암살'은 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이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친일파와 일본군 사령관 암살 작전을 모의하는 데서 시작한다.
김원봉 단장을 주축으로 1919년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단체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폭파 등 직접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김원봉 단장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한 뒤 참모장으로서 의열단을 이끌었던 우근 류자명(1894∼1985)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학술 세미나가 12일 열렸다.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주최로 서울 서대문구 독립관에서 열린 '류자명 선생 서거 30주기 추모 학술세미나'에서 김명섭 단국대 강사는 "류자명 선생은 민중폭력혁명 노선을 끝까지 견지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류자명 선생이 김원봉 단장의 권유로 의열단에 들어간 것은 1922년 6월이다.
김 강사는 "류자명 선생은 뒤늦게 의열단에 가입했지만, 1924년 이후 김원봉 단장을 비롯한 대다수 단원이 폭력노선을 포기하고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으려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홀로 상하이의 의열단에 남아 의열투쟁 노선을 고수했다"고 밝혔다.
류자명 선생은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 중 가장 먼저 아나키즘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의 신념으로 정착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또 좌우익 이념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일본이나 중국 동지들과도 친교가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강사는 "류자명 선생의 폭넓은 교류망과 두터운 인간관계는 그가 살인과 파괴, 배신과 좌절이 난무하는 혁명 일선에서 죽음을 넘어선 민족혁명가이며 국제주의적 동지로서의 면모를 갖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는 "류자명 선생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며 "암살과 파괴를 실천하는 테러리스트의 면모뿐 아니라 아나키스트 세력을 대변해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정치적 활동가의 면모와 독립투쟁 틈틈이 자신의 전공 분야인 농업기술을 중국 학생에게 가르치는 교육자·농학자로서의 면모 또한 지녔다"고 설명했다.
류자명 선생의 자주적 행보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우익세력이나 소련의 지시를 따랐던 조선 공산당과 달리 류자명 선생은 어느 나라도 사대하지 않고 자주노선을 걸었다는 것이다.
김 명예교수는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자주적 노선에 있다"며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당하게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 자주노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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