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달라' 독일 vs 일본 과거사 대응 태도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8-10 18: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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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한때 침묵의 공동체…국내외 압력·경제이해·리더십으로 변화


'달라도 너무 달라' 독일 vs 일본 과거사 대응 태도

독일도 한때 침묵의 공동체…국내외 압력·경제이해·리더십으로 변화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앞두고 독일과 일본의 대조적인 과거사 대응 태도가 새삼 주목된다.

현재로선 아베 담화가 한국 등 피해 당사국이 수용할 수준의 과거사 직시, 반성, 사죄를 담아낼 수 있을지 미심쩍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 점에서 나치 과거사의 국내외 청산에 앞장서며 유럽 중심국으로 발돋움한 독일의 사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독일에선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나치 청산 역사에 기록될 판결 하나가 또 나왔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아우슈비츠 30만 학살 방조 혐의로 기소된 나치 친위대원(SS) 오스카어 그뢰닝에게 징역 4년이 선고된 것이다.

94세 고령자에 대한 70여 년만의 단죄였다. 그뢰닝은 사과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변호인단을 통해 항소한 상태다.

검찰에 수사 자료를 넘기는 정부기관인 '나치범죄 조사 중앙본부'의 쿠르트 슈림 수석은 지난 4월 나치 수용소 간수와 관련해 12건을 추가 기소하겠다고 했다.

슈림 수석은 기소 검토 대상자들이 모두 90세 전후의 노령이라며 "단 한 사람의 나치 전범이라도 남아있다면, 또 그가 100세까지 살더라도 끝까지 우리의 조사는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유럽의 최강 지도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리더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과거사 직시와 반성 행보는 올해 들어 한층 두드러졌다.

독일 역시도 종전 70돌(5월 8일)이긴 마찬가지여서 숱한 기념일에 즈음한 연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반성 메시지를 발신했다.





지난 1월 베를린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돌 연설은 그 중 압권이었다.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항구적 책임"이라고 그는 말했다.

5월 2일 공개한 종전 기념 메시지도 같은 맥락이었다. "역사에 마침표는 없다"라며 가없는 과거사 직시와 반성 의지를 다졌다.

이튿날에는 최초의 나치 강제 집단수용소인 바이에른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가 나치 과거사를 잊지 않겠다고 또 다짐했다. 독일 현직 총리가 수용소 해방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앞서 3월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선 "독일은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과거 정리(청산)는 화해를 위한 전제"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과거와 마주한 메르켈의 여정은 2005년 총리에 취임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2003년 10월 자신이 속한 기독민주당(CDU) 출신 연방의원이 유대인을 가해자로 보는 시각에도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다고 하자 그를 당원에서 제명했다. CDU 당수로서였다.

총리에 오르고 나선 더욱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2007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자신 이전 모든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특별한 역사적 책임을 의무로 여겼다며 "나 역시 특별한 역사적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한다"며 독일의 잘못을 사과했다.

독일 총리로는 최초로 2008년 3월 이스라엘 의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선 "쇼아(홀로코스트의 히브리어)는 독일인에게 가장 큰 수치"라며 희생자와 생존자 모두에게 "머리를 숙인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작년 7월 한국과 함께 일본에 과거사 갈등의 대척점에 있는 중국 방문에서도 과거사 주제를 건드렸다.

당시 칭화(淸華)대 연설에서 독일인들의 과거사 반성이 "고통스러웠지만, 옳았다"면서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평했다.

지난해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연설에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한 시점 역시 1938년 '11월 9일(장벽 붕괴 기념일)'이었다며 이날을 "수치와 불명예의 날"로도 규정했다.

메르켈 총리는 "바로 이 때문에 오늘, 우리는 기쁨만이 아니라 독일의 역사가 우리에게 지워주는 책임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거사 반성과 직시의 주체는 총리만이 아니었다.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은 지난 5월 독일 언론 인터뷰에서 "비단 소련인들 만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소련인들에 의해서도 우리는 5월 8일 해방됐다"며 독일-소련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치 주도의 2차 세계대전 종전과 나치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소련의 기여를 평가했다.

가우크 대통령은 같은 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홀테-슈투켄브로크 지역에 있는 옛 326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한 연설에서 소련 포로 전체 수치를 530만 명으로 전하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고도 밝혔다.

그러면서 유대인 대학살 문제 탓에 이런 일을 포함한 나치의 다른 전쟁범죄들이 가려 있지만, 독일인들은 이를 직시해야 한다고까지 짚었다.

그는 "전쟁은 독일인들이 스스로 나치 독재로부터 해방되면서 끝난 게 아니라, 독일이 연합국에 패전하면서 끝났다"면서 종전의 뜻을 되새겼다.

또 독일-이스라엘 외교관계 수립 50돌을 기념해 베를린을 찾은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과 함께 베를린 그루네발트 역사의 17번 선로 기념물에 헌화하고 나서 독일 뿐 아니라 유럽 내 일고 있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동안 독일 정부는 1953년 전후 처리의 방향을 결정한 런던채무협정에 따라 국가배상(보상) 문제를 유보했지만, 이후 점차 보상 행위를 확대해 왔다.

1950년대 나치 피해자 연방 보상법을 통해 자국 거주자 위주의 속지주의에 근거해 개인 보상을 했고,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유대인을 지원하는 법률 등으로 홀로코스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이행했다.

1959∼1964년에는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영국, 스웨덴 등 서구 피해국과 개별 협정을 맺어 보상하고, 1990년 통일 이후에는 폴란드 등 동유럽 나치 피해자 대상의 화해기금을 만들어 보상을 이어갔다.

2000년 들어선 정부와 당시 강제노동 관련 기업들이 함께 100억 마르크(6조원) 재원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만들어 여러 국가의 징용 피해자들에게 개인 보상을 시행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독일 사회도 그러나 과거사에 눈을 감고 입을 닫아 '침묵의 공동체'라고 불리던 시기를 거쳤다. 또 총리나 대통령마저 나치와 연결된 인사들이 등극하던 시절이 있었다.

1966∼69년 재임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전 총리는 29세 나이로 나치에 합류하고 군 복무한 전력이 있었고, 하인리히 뤼브케 전 대통령은 나치 강제수용소를 설계한 이력이 있었을 정도다. 그밖에 적지 않은 정부 인사들이 나치 배경을 가졌다.

하지만 침묵의 공동체는 탈 나치 열망의 6.8세대 등 진보세력의 역사청산 저항과 유대인 사회 등 피해 주체 및 전승 연합국의 국제적 압력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 폴란드 희생자 기념탑 앞 무릎꿇기 같은 강렬하고도 진정성 있는 역사 사죄 행위 및 외부경제관계 확장 요구가 맞물리면서 비로소 '침묵'은 깨졌고, 이후 독일의 과거사 직시와 사죄 행로는 크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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