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재건축 앞둔 美 동부 독립운동 거점 뉴욕한인교회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8-10 07: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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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탄 성명서 발표 등 독립운동 다양하게 전개
유학생·노동자들에게는 망국 설움 달랜 공간
건물 노후화로 조만간 재건축 시작
△ 뉴욕한인교회 모습. 건물 중앙에 있는 2개의 출입구중 하늘색 출입구를 기준으로 한 오른쪽 절반이 뉴욕한인교회 건물이다.

<광복70년> 재건축 앞둔 美 동부 독립운동 거점 뉴욕한인교회

일본 규탄 성명서 발표 등 독립운동 다양하게 전개

유학생·노동자들에게는 망국 설움 달랜 공간

건물 노후화로 조만간 재건축 시작



(뉴욕=연합뉴스) 박성제 특파원 = 일본의 만주침략이 6개월째로 접어든 1932년 2월 19일.

당시 미국에서 대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단체의 대표들이 뉴욕에 모였다. 국민회를 대표한 조극과 교민단 대표 남궁염, 동지회 뉴욕지부장 최용진, 그리고 흥사단 뉴욕지부 허진업 등이 조선에 이어 만주까지 삼키려는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미국과 멕시코, 쿠바, 하와이를 대표하는 한인 단체들은'으로 시작하는 결의문은 일본의 영토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경제제재를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결의문은 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윌리엄 보라 상원 외교위원장, 존 가너 하원의장에게 각각 전달돼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결의문이 작성된 곳은 맨해튼 115번가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고 컬럼비아대와 지척인 이 건물의 정문에는 '한인 교회'라는 한자와 함께 'Korean Church and Institute'라는 영어가 선명했다.

이 건물이 미국 동부지역에서 펼쳐진 대한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수많은 동포가 나라 잃은 슬픔을 나누고 독립 의지를 키웠던 뉴욕한인교회다.







허드슨강변에 차를 세우고 오르막길을 50m가량 올라가자 뉴욕한인교회 건물이 나왔다. 건물 꼭대기에 큰 십자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건물 앞에 예수 조각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위의 다른 건물과 구분되지 않는다. 건물 정면에 적힌 글자를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미국 동부지역 독립운동의 메카인 이 건물은 이제 인적이 끊겼다. 새 건물을 지으려고 6월 28일 예배를 끝으로 자물쇠가 채워졌다. 이제교회 정문에는 114가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 예배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이 교회의 이용보 담임목사는 "1800년대에 지은 건물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건축연도는 모르겠다."며 "건물이 너무 낡아 더는 사용하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고 말했다.

건물이 폐쇄되기 1개월여 전에 이 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건물 내부는 재건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줬다. 2층으로 올라갈 때에는 몰랐지만 3층,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는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계단이 한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중간중간에 세워둔 지지대도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계단이 무너질까 봐 몸이 벽 쪽으로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4층에 올라가자 문 위에 작게 붙어 있는 '8호실'이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뉴욕을 방문하는 한인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던 방의 하나로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지 2개월여 뒤인 1931년 10월 '뉴욕한인공동회' 명의로 규탄서를 작성했던 바로 그 방이다.

이 교회 건물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예배당뿐만 아니라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의 장소라는 사실도 애초부터 명시됐다. 컬럼비아대 유학생이었던 조병옥 등이 교회를 설립할 때 민족공동체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그래서 교회의 영문 이름에 'Church'뿐 아니라 'Institute'도 포함했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서 저자 한승인 장로는 "뉴욕한인교회는 위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아래로 조국의 독립과 재류 교포사회의 번영을 병행한다는 것을 존재 의미로 삼아 왔다"고 적었다.

이런 취지에 따라 뉴욕한인교회는 독립운동을 위한 거점으로서 역할했으며, 노동자와 유학생 등 동포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랜 곳이었다.

1927년 이 건물을 교인들이 사 입주하고 나서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조병옥 등이 뉴욕을 찾았을 때에는 어김없이 뉴욕한인교회로 향했다. 교회에서 교포와 동지를 만나 결의를 다지고 해방을 위한 전략도 다듬었다.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안익태가 애국가를 완성한 곳도 이 교회로 알려졌으며 그가 사용했던 에머슨 피아노는 교회 지하에 보관돼 있다.





이 교회는 유학생들이 독립사상을 키워나간 중심지이기도 했다. 재류조선학생총회의 기관지 '우라키'가 이 교회에서 편집되기도 했다.

아울러 조지워싱턴브리지 건설 현장을 비롯해 뉴욕 인근에서 막노동하면서 조국에 돌아갈 날을 그리워했던 노동자들도 이 교회에서 시름을 달랬다. 꼬깃꼬깃해진 달러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독립운동자금으로 건네기도 했다.

많은 한인이 모이다 보니 분쟁과 언쟁도 잦았다.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 간 갈등이 도를 넘어 멱살잡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친일파가 칼을 맞는 일도 있었다. 워싱턴DC에서 일본 관리로 근무하던 친일파가 뉴욕을 방문할 길에 교회 송년회에 참석하자 의협심 강한 교인이 "독립운동의 거점에 친일파가 들어왔다"며 찔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립운동의 거점이 사라지는 데 대해 서운한 마음을 표출하는 동포들이 많다. 이 교회 목사 출신인 장철우(76) 문화재찾기 한민족네트워크 뉴욕지회장은 "뉴욕한인교회는 민족정기를 보여주고, 민족정기를 이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서 "새 건물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반영하고 후세들에게 민족의 얼을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 측은 안전 문제 때문에 신축이 불가피하지만 새 건물 1층에 역사 기념관을 만들어 역사적인 건물이 사라진 아쉬움을 달랠 계획이다. 또 건물 정면 외벽만이라도 살리는 방안을 건축업자와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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