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전화사기 대포통장 주인도 피해배상 책임"
통장 만들 때 '양도시 책임' 항목에 동의…배상 근거로 작용
(서울=연합뉴스) 최송아 기자 = 보이스피싱(전화 금융사기)에 사용된 통장 주인도 피해자에게 손해를 일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계좌 개설 때 '통장이나 현금카드를 양도하면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내용이 신청서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A(36)씨는 2013년 9월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이다. 금융사기단에 연루돼 대포통장이 만들어져 사기에 이용됐으니 누명을 벗으려면 알려주는 사이트에 접속해 금융정보를 입력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놀란 A씨는 그가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주민등록번호, 보안카드 번호, 보안카드 비밀번호까지 넣었다.
하지만 내용을 모두 입력했더니 사이트는 사라졌다. A씨는 '수사관'과 연락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고 돈은 빠져나간 뒤였다.
범인은 대가나 대출금을 미끼로 확보한 7명의 통장으로 A씨의 돈 4천700여만 원을 이체한 뒤 6명의 통장에서 4천500만 원가량을 인출하고 사라졌다.
구제받을 길을 찾던 A씨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이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민사소송을 무료로 도와준다는 소식을 듣고 의뢰해 통장 주인 6명을 상대로 부당 이득금 반환 소송을 냈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봤을 때 이체된 돈이 해당 계좌에 남아있지 않으면 사실상 구제받기 어렵다.
올해 1월 대법원에서는 계좌 명의자에 대한 공동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가 통장 주인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통장 주인은 범죄에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고 통장을 양도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피해액 600만원 중 통장에 남은 5천원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A씨의 사건을 담당한 강문혁 변호사는 통장 주인의 책임을 인정할 만한 증거를 찾다 은행에서 신규거래를 할 때 쓰는 거래신청서에 주목했다.
자유 입출금식 등 각종 통장을 개설할 때는 '통장·현금카드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는 내용이 거래신청서에 포함돼 있다.
A씨 측은 이와 함께 계좌 명의자의 서명과 날인, 신분증 사본 등을 제출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8단독 김정운 판사는 올해 6월 "피고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해도 통장이나 현금카드 등을 스스로 건네줘 범죄행위가 쉬워지게 도왔다"며 공동 불법행위자로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김 판사는 "계좌를 개설하고 현금카드를 받을 때 '타인에게 양도하면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문구가 기재돼 있다"며 A씨 측이 제출한 증거 내용을 인정했다.
"나도 속아서 통장을 줬다"는 주장이 인정되거나 대가를 받지 못하면 전자금융거래법상 처벌은 피할 수 있지만, 김 판사는 이런 통장 주인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다만 "보이스피싱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원고도 제대로 확인 없이 계좌번호를 알려준 과실이 사건의 손해 발생과 확대에 기여했다"며 피고의 책임을 30%로 제한했다.
강문혁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 이후 예금 명의자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되는 추세였으나 공동 불법행위 책임을 항상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며 "동종 사건 피해자 구제에 도움이 될 만한 선례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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