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중국에서 북한까지…조선의용군의 여정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7-28 07: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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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의 본대와 갈라져 중국 공산당 지휘체계로 편입
일부 북한서 정치세력화…"이념 뛰어넘어 재조명해야"
△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 내부 (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허베이(河北)성 한단(邯鄲)시 섭(涉)현에 위치한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 내부. 지난 2004년 중국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된 기념관은 조선의용대와 관련한 자료를 한국어와 중국어로 전시하고 있다. 2015.7.23 okko@yna.co.kr

<광복70년> 중국에서 북한까지…조선의용군의 여정

임정의 본대와 갈라져 중국 공산당 지휘체계로 편입

일부 북한서 정치세력화…"이념 뛰어넘어 재조명해야"



(한단=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과 산시성(山西省)의 경계를 이루는 타이항(太行)산맥은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였다.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 본대에서 한반도 입성을 꿈꾸며 북으로 올라온 일부 조선의용대원은 이곳에서 조직을 정비하며 항일 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타이항산 주변에는 의용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난 6월 말 의용대의 발자취를 찾아 허베이성의 도시 한단(邯鄲)을 찾았다.

한단에서 출발해 상우춘(上武村)과 윈터우디춘(雲頭低村)을 지나 난좡춘(南庄村)에 이르는 여정은 70여 년 전 조선의용대가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걸었던 길이다.

◇ 중국 땅에 세워진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

한단에서 차로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스원춘(石問村).

조선의용대의 주둔지였던 윈터우디춘을 지나 중위안춘(中原村)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옛 묘소가 있는 곳이다.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두 열사의 시신은 이곳에 묻혔다 지난 1950년 한단시 진지루위(晉冀魯豫) 열사릉원으로 이장됐다.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은 열사들의 옛 묘소 아래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의 주인공은 조선의용군과 의용군의 전신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다.

1938년 허베이성(湖北省)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는 무장 선전에 주력하며 항일 투쟁에 힘을 보탰다. 이 가운데 일부가 1941년 북으로 올라와 현지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창설했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 아래 세를 불려가던 화북지대는 이듬해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큰 타격을 입고 만다. 지휘관이었던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도 당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은 조선의용대(군)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4년 중국 한단시와 서(涉)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됐다.

면적 100㎡의 기념관은 일제 침략부터 조선의용대의 탄생, 한·중 관계의 증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관련 사진과 사료를 한국어와 중국어로 전시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5년 전 한 차례 전시물을 교체해 지금까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다.

상룽성(尙榮生·60)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장은 "기념관은 중국 정부가 자국에서 진행된 한국의 독립운동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며 "양국 모두에 소중한 공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조선의용군으로 거듭나며 팔로군과 공동보조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거리의 중위안춘은 일본군의 소탕 작전에 타격을 입은 조선의용대가 정착한 곳이다.

지휘관을 잃은 의용대원 100여 명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의 지원 아래 다시 세를 규합하기 위해 팔로군 129사단과 가까운 중위안촌의 사찰 원정사(元定寺)로 근거지를 옮겼다.

1942년 7월 원정사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팔로군에 있던 김무정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조선의용대의 개편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였다.

당시 의용대 화북지대는 본대가 없는 상태였다. 두 달 전 충칭에 있던 본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편입했기 때문이었다.

본대를 잃은 화북지대는 조직 개편을 통해 자신을 지원하던 공산당 팔로군과 함께하는 노선을 택했다. 이때부터 의용군이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게 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의용군 개편과 함께 화북조선청년연합회도 화북조선독립연맹으로 탈바꿈했다.

의용군의 지도기구 격인 화북조선독립연맹은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연안파라는 정치 그룹을 형성했지만 한국전쟁 직후 대부분 숙청당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재탄생한 원정사는 지금도 당시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찰 건물 가운데 한 곳은 2010년 마을 주민들이 간이 전시관으로 개조해 당시 의용군이 썼다는 탁자와 의자,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내부는 허름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민 양바오딩(楊保定·70) 씨는 "당시 의용군들이 엄동설한에도 강에 가서 수영하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끼리 대단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며 "이런 역사를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유적지를 잘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 유치원으로 변한 군정학교…잊힌 의용군

중위안춘을 떠나 인근 난좡춘의 한 유치원 건물을 찾았다.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주둔지가 있던 곳이다.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조선의용군은 1944년 난좡춘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독립 투쟁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길러냈다.

군정학교의 초대 교육장이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이다.

군정학교 건물은 2002년 지어진 유치원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로 꾸민 유치원 건물이 낡은 군정학교 건물 옆에서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휘관을 꿈꾸던 조선의 청년들이 고된 훈련을 받던 곳에서 과거의 역사를 알 리 없는 중국의 아이들이 뛰논다고 생각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의용군은 이곳에 머물며 자력갱생을 내세웠다. 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인근 오지산을 개간해 호두와 감 같은 농작물을 직접 재배하기도 했다.

탐방에 동행한 현지 안내원 왕춘샹(王春香·45) 씨는 "2002년 한국 대학생 탐방단이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마을 주민들이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줬다"며 "조선의용대가 심은 나무에서 땄다며 호두와 감을 직접 학생들의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의용군은 광복 후 만주로 이동해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이들은 만주의 조선인을 보호하며 중국 국민당과의 전투에 참전했고, 일부는 북한으로 넘어가 한국전쟁에서 남한의 적군이 됐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용대의 독립투쟁은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화북 지역의 유적지가 반세기 가까이 방치되던 이유다.

상룽성 관장은 "현지 주민의 노력으로 그나마 지금은 보존이 잘되고 있지만 체계적인 관리는 아직 부족하다"며 "이데올로기라는 민감한 이슈가 있다 해도 독립운동사의 한 갈래인 만큼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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