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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방문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묵는 호텔 근처에서 지난달 21일 오후 일본 우익 인사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광복70년> 역사교육 부재가 낳은 일탈…日혐한시위
시민사회 중심 자성 목소리…아베 정권, 미온적 대응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지난달 21일 일본 도쿄 외무성 이쿠라(飯倉) 공관 건너편과 그 이튿날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린 쉐라톤 미야코 호텔 주변에는 '불청객'들이 진을 쳤다.
검은색 승합차를 앞세운 우익 혐한 시위대였다. 숫자는 10명 안팎이었지만 확성기로 "일본이 원조를 해 줬는데 한국은 그 은혜도 모르느냐"며 고래고래 외쳐대는 이들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몇년전부터 사회를 향한 불만 배출의 통로로 인터넷에 혐한 댓글을 올리던 일본인 곤도 도시카즈(39·近藤利一) 씨는 3월 25일 경비요원들이 퇴근한 늦은 밤 도쿄 신주쿠(新宿)구 한국문화원 보조 출입구 외벽에 라이터용 기름을 뿌린 뒤 불을 붙였다. '온라인 혐한 논객'이 '오프라인'에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식민지배로 한국민에 가혹한 고통을 안긴 '가해국' 일본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일본에서 '혐한시위'의 동의어로 통하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국민이나 인종에 대한 혐오 발언과 시위, 댓글 등을 총칭)'는 2013년 일본 10대 유행어로 뽑힐 만큼 이미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유엔 기구 등의 시정 권고가 잇따르면서 헤이트 스피치를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아베 정권은 계몽 활동 외에 뚜렷한 대책을 내 놓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혐한 시위는 한일 외교 협상 장소와 수교 기념 행사장 코 앞에서까지 '맹위'를 떨쳤다.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전문가들은 극단적이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재일(在日)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같은 혐한 단체가 누군가의 재정 지원을 받아가며 버젓이 활동하는 것은 일부의 '공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재특회의 활동이 마음 한구석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은 제대로 된 역사교육의 부재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양국 정부간의 양보없는 갈등이 일본의 혐한, 한국의 반일 정서를 부추기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혐한'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면 한일간 숱한 미해결 과제를 낳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 사실이 일본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기성 세대의 기억에서는 점점 흐려지는 상황과 직면하게 된다.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재일 조선인들에게 자행한 학살을 다룬 책 '9월, 도쿄의 길 위에서'를 펴낸 프리랜서 저술가인 가토 나오키(加藤直樹)씨는 작년 언론 인터뷰에서 혐한 시위대가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일본에 불복종하는 조선인)'이라는 글자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도로에서 조선인을 죽이자'는 말이 사용된 것은 간토대지진 이후 처음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직결됐다"며 개탄했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92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살을 현재의 일본인들이 제대로 교육받아 알고 있다면 '불령조선인'과 같은 구호는 용납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일간 당면 현안인 군위안부 문제도 교육 당국과 언론이 진실을 알리길 꺼리는 가운데, '과거사 반성'의 소재가 되기보다는 혐한 여론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부 제도에 관여한 사실을 모르는 많은 일본인 눈에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한국의 '집요함'만 보이고, 조상들이 저지른 식민지 여성에 대한 인권 유린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작년 8월 아사히 신문이 제주도에서 여성들을 강제연행했다고 주장한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씨 주장을 토대로 한 과거 기사를 오보로 인정하고 취소한 이후 더욱 강해졌다. 일본 정부는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주장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리고,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언론의 목소리는 위축됐다.
일본 사회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현재까지 100개 이상의 지방의회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규제하는 법률 제정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했다. 또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 의원(민주당)과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 의원(사민당) 등 국회의원 7명은 지난 5월 '인종 등을 이유로 하는 차별 철폐를 위한 시책 추진에 관한 법률안'을 참의원에 제출했다.
여기에 더해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지난 2일 헤이트 스피치 실태를 조사하고, 인종 차별 해소를 위한 기본법 제정을 포함한 인종차별 철폐 정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는 요망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집권 자민당의 태도는 아직 미온적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이유로 혐오 시위 규제 법률을 제정하는데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혐한시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작년 자민당내 '헤이트스피치 검토 프로젝트팀'은 결성됐지만 회의에서는 오히려 한국의 대 일본 헤이트스피치 실태와 규제 검토 상황을 조사할 것을 관계 부처에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장기 침체가 낳은 일본인의 자신감 상실과 보수화, 가해 사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일본의 자긍심'을 강조하는 아베 정권의 교육 기조가 어우러지면서 당분간 혐한 시위는 쉽게 근절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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