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르포> 美대사관 개관 앞둔 쿠바인들 "한걸음씩 기대"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7-03 11: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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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분위기 속 양국 관계 중대한 '첫 걸음' 환영
미국 영향력 확대로 발생할 변화에 조심스러운 반응도
△ (아바나<쿠바>=연합뉴스) 장현구 특파원 = 쿠바 공산당기관지 그란마가 2일(현지시간) 1면에 전날 대사관 재개관을 발표한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합의문을 실었다. 2015.7.3 cany9900@yna.co.kr

<아바나 르포> 美대사관 개관 앞둔 쿠바인들 "한걸음씩 기대"

차분한 분위기 속 양국 관계 중대한 '첫 걸음' 환영

미국 영향력 확대로 발생할 변화에 조심스러운 반응도



(아바나<쿠바>=연합뉴스) 장현구 특파원 =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 시대의 풍경이 도시 곳곳을 에워싼 쿠바의 수도 아바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오는 20일(현지시간) 양국에 대사관을 재개설하기로 합의하고 국교 정상화를 전격 선언한 지 하루가 지난 2일, 아바나 시내는 차분했다.

지난 1961년 1월 3일 단교한 이래 54년 6개월여 만에 양국이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외교를 정상으로 복원하게 됐다는 핵폭탄급 뉴스에도 쿠바 국민은 특유의 느긋함으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겠다는 듯했다.

정열적인 살사와 재즈를 사랑하는 국민의 기질상 어디선가 다 함께 모여 춤이라도 추며 기꺼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축하하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런 예상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반백년이 넘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쿠바인들의 현실감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미국과 쿠바의 역사적인 전진을 바라보는 쿠바 국민의 심정은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의 "멀고도 긴 협상의 첫 단계를 넘은 것"이라던 보도와 일치한다.



그란마는 이날 1면에 카스트로 의장과 오바마 대통령을 나란히 싣고 두 정상이 주고받은 합의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도를 마쳤다.

지난해 12월 양국 정상화 국교 정상화 본격 추진 선언 때 평소의 두 배에 달하는 16면을 발행해 전격적으로 조명한 것에 비하면 침착한 반응이다.

미국의 금수조치 해제가 두 나라 정상화의 본질이고, 의회를 장악한 미국 공화당과 차기 공화당 미국 대통령 경선 주자들의 대사관 재개관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앞으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쿠바 국민이 잘 아는 탓이다.

계기판도, 시계도 멈춘 1946년식 포드 승용차를 씩씩하게 몰던 남자 운전사는 "과연 그 날(대사관이 재개관하는 20일)이 오나 한 번 지켜보자는 심정"이라고 했다.

선언적 의미는 크지만, 일상에 큰 파장을 부를만한 일이 아니기에 역사에 기록할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쿠바는 작은 나라이고, 내부적인 문제도 적지 않지만, 국민 모두는 나라를 사랑한다"면서 "관계 정상화로 미국 문화가 쿠바에 스며들어 어떻게 쿠바를 바꿀지 조심스럽다"고 전망했다.

쿠바에서 11년을 거주한 정호현(43) 씨는 이를 두고 "단계적인 진전을 의미하는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과 같은 말로 '파소 아 파소'(Paso a Paso)가 현재 쿠바인들의 정서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쿠바 시내 최대 번화가로 아바나 리브레 호텔과 야라 극장이 만나는 교차로에 있는 유서 깊은 아이스크림 전문점 코펠리아에서 가족과 함께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던 중년 가장 라몽(61)은 "양국의 정상화를 기쁘게 생각한다"면서도 "금수조처로 쿠바를 고립시킨 건 미국이 잘못했다"고 따끔하게 질책했다.

미국 정부도 50년 넘게 이어진 쿠바의 경제제재가 더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을 우선 인정했다.

거리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알티레 리오산체스(75) 할아버지는 "양국이 아주 좋은 선택을 했다"면서 "별 것도 아닌 일로 두 나라가 너무 오랫동안 싸웠다"고 평했다.

친미 독재정권을 이끈 폴헨시오 바티스타, 혁명으로 바티스타를 권좌에서 쫓아낸 피델 카스트로 등 여러 쿠바의 집권자를 봐온 리오산체스는 "미국에서 90마일(약 145㎞)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덕분에 경제제재 하에서도 언제나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해왔다"면서 조만간 경제 봉쇄도 차례로 풀릴 것으로 내다봤다.

경제 봉쇄를 당하지 않던 54년 전과 지금의 차이는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내겐 피델 카스트로 이전과 이후일 뿐"이라면서 "바티스타 정권 때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내가 글을 읽고 쓰면서 일을 하게 된 것도 다 피델 덕분"이라며 쿠바 혁명의 산파에 변함없는 존경심을 보냈다.



그러나 시내 주변에 있던 쿠바 아바나 대학 경제학과 학생들은 이런 구세대들의 반응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여학생은 "이제 미국에 대한 욕도 덜 해야겠다"면서 "그간 내부의 문제를 모두 미국의 금수조처 탓으로 돌인 정부의 행태를 지켜보기 위해서"라며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옆에 있던 남학생도 "외국인 직접 투자 활성화, 경제 양성화 조치로 쿠바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국 물건이 직접 건너오지 못하고 우회로 들어오면서 쿠바에서 물건 가격이 폭등하고 중간 업자들만 배를 불리는 불합리한 현실을 꼬집은 셈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유물이 된 이념 문제에 대해 이 학생은 "철학을 공부하는 소수에게만 관심 있을 뿐 먹고 사는 문제가 대부분 개인에게 더욱 중요하다"고 답했다.

실제 쿠바에서 가장 대우를 받는 의사 직군의 월급이 올해 인상됐다고 하나 45 쿡(CUC · 1 CUC=24페소), 우리 돈 5만 4천원 수준으로 아주 박하다.

쿠바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20∼30 CUC로 2만4천∼3만6천원 수준. 청바지 한 벌이 20 CUC, 구두 한 켤레가 80 CUC에 달하는 상황에서 누구든 여러 직업을 뛰어야 그나마 치장을 하고 산다고 정호현 씨는 설명한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아바나로 넘어오는 2일 오전 비행기에서는 한 사람이 허용치의 몇 배가 넘는 물건을 동행자와 함께 집단 구매해 단체로 들여오는 장면이 목격됐다.

주로 LG 전자의 에어컨, 삼성전자의 TV 등 가전제품으로 쿠바에서는 너무 비싸서 비행기로 2시간 45분 떨어진 멕시코시티에서 사다가 나르는 것이다.

경제난에도 쿠바의 관광 수입은 6월 말 현재 작년 같은 기간 대비 20%나 상승해 특수를 누린다. 하루 35 CUC를 받는 민박과 그보다 비싼 호텔은 세계 각국에서 넘어온 관광객으로 붐빈다.



쿠바를 처음 찾았다는 미국 30대 여성 웬디는 "쿠바 사람들이 매우 친절해 인상적"이라면서 "다만 인터넷 등 여러 환경이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된 바하마와 큰 차이가 나지만 보고 즐길 게 많은 쿠바가 참 좋다"며 양국의 관계 개선이 쿠바의 관광 인프라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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