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수동·동숭동' 일본식 개명 지명도 다수…"대체어 찾기 힘든 경우도 있어"
<광복 70년> 생활 속에 뿌리박힌 일제 잔재
'무대포·기라성' 언어 부분 가장 심각…직급·법령문에도 일본식 표현
'관수동·동숭동' 일본식 개명 지명도 다수…"대체어 찾기 힘든 경우도 있어"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일제 강점기가 끝난 지 올해로 70년이 됐다. 그러나 언어와 제도 등 우리 생활 곳곳에는 아직도 일제가 남기고 간 흔적들이 많다.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분야에서 일제 문화의 잔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언어 표현이다.
일본어 단어가 그대로 쓰여 일본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말들은 많이 고쳐졌다. 그럼에도 일본어 영향을 받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우리 말인 줄 알고 쓰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막무가내'라는 의미로 쓰이는 '무대포'는 일본어 '무데뽀'에서 온 말이다. '무대포'는 외래어 표기법에 어긋나지만 신문 기사에도 등장할 정도로 익숙하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란 뜻으로 신분이 높거나 권력 등을 가진 사람이 모인 것을 비유하는 기라성(綺羅星)은 한자어로 알기 쉽다.
그러나 '기라'는 '반짝이다'라는 의미의 일본어 '기라'를 한자로 취음한 것이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표현 역시 일본어의 관용어를 한글로 고쳐 그대로 빌려 쓴 사례다.
일상생활의 언어뿐 아니라 전문 용어에도 일본어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일본을 거쳐 외국의 제도와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번역용어가 그대로 정착된 탓이다.
수소, 탄소, 질소 같은 원소명이나 공소, 항소, 형사 등 법률 용어, 회장, 사장, 과장, 계장 같은 조직 관련 용어들이 모두 일본에서 건너온 표현이다.
7급과 8급 공무원의 직급 명칭인 주사보와 서기도 일본식 계급 명칭의 잔재다.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주무관이란 호칭을 많이 사용하지만 여전히 공식 직급 명칭은 주사보와 서기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아직도 '춘희'(椿姬)라는 제목과 함께 소개될 때가 잦다. 미국 작가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 '리틀 프린세스'(A Little Princess)도 여전히 '소공녀'(小公女)라는 일본어 번역 제목이 더 친숙하다.
법령문도 일본식 한자어가 많이 쓰이는 분야다. 예컨대 보험 분야에서 자주 쓰는 '계리'(計理)는 '회계처리'라는 알기 쉬운 표현이 있는데도 여전히 법령문 등에서 쉽게 본다.
산업 현장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에도 일본어 잔재가 많다.
건설 분야에서 일본어 흔적이 뚜렷하다. '노가다'(현장근로자), '시마이'(마감), '기스'(흠) 같은 말들은 일반인도 자주 쓸 정도로 널리 확산했다.
단어뿐 아니라 일본어투 표현도 문제다. 예를 들어 '∼의'라는 표현은 일본어 '노'(の)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생략해도 문제가 없을 때가 많지만 습관적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다.
지명도 일본강점기에 바뀌었음에도 아직 남은 사례가 흔하다.
서울 종로구 관수동(觀水洞)과 동숭동(東崇洞) 등은 일제 강점기에 고유 지명을 잃고 개명됐다.
최근 경상남도 밀양시는 일본 강점기 때 개명돼 현재까지 쓰이는 '천황산'(天皇山) 명칭을 원래 고유지명인 '재악산'(載嶽山)으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제 잔재는 교육제도에서도 발견된다.
대표 사례가 유치원이다.
유치원(幼稚園)이라는 용어는 일본학자들이 독일어 킨더가르텐(Kindergartedn)을 번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유치'(幼稚)라는 단어에는 '나이가 어리다'라는 의미와 함께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는 뜻도 있는 만큼 교육기관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이 때문에 유치원을 유아학교로 변경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기도 했지만 별 진전이 없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2010년 학교장이 하는 '훈화'(訓話)도 교육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일본식 조어 중 하나로 꼽았다.
학교에서 구령에 맞춰 단체로 인사하는 문화나 아침 단체 조회 역시 일제 문화의 영향이 남은 사례다.
광범위하게 퍼진 일본 문화의 찌꺼기를 없애려는 노력은 각 분야에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2002년부터 국기를 액자에 넣어 걸었던 '태극기 액자'가 사라졌다. 액자형 태극기가 일제 잔재라는 지적 때문이다. '국민학교' 명칭은 1996년 3월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이제는 완전히 정착했다.
행정자치부는 2011년 일본말에서 유래한 한자어 등으로 된 행정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꿔주는 시스템을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보급했다.
법제처는 법령 정비 기준에 일본식 한자어 기준을 따로 마련해 우리말이나 쉬운 한자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대부분 정부 부처가 정부 입법 때 법제처의 권고안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잔재가 많은 만큼 고쳐야 한다는 원칙에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대안 마련에는 어려움이 있다.
일제 잔재가 워낙 뿌리 깊게 남은 터라 우리말로 바꾸려 해도 적절한 대체어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법제처 관계자는 "법령은 우리말로 확실히 바꿀 수 있는 대안이 있고 용어 자체가 일본어의 색채가 지나치게 강하면 우리식 용어나 쉬운 한자로 반드시 바꾸고 있다"면서 "일본식 한자어라도 바꿔서 사용할 만한 우리말을 찾기 어렵거나 우리말이 법령문에서 원래 의미와 일치하지 않으면 바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명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주민들이 개명을 반대하는 때도 있다.
서울의 한 자치구는 2004년 일본 강점기에 바뀐 일부 동(洞)의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동의를 얻지 못해 개명에 실패했다. 해당 동은 여전히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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