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5주년> 장진호전투 주역 "한국전쟁은 승리한 전쟁"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6-23 06:43:16
  • -
  • +
  • 인쇄
美 옴스테드 예비역 중장, 불멸의 동투·흥남철수 생생히 기억
버지니아주에 기념비 건립 추진…미 중학생들 가꾼 '38선 정원' 찾아


<6·25 65주년> 장진호전투 주역 "한국전쟁은 승리한 전쟁"

美 옴스테드 예비역 중장, 불멸의 동투·흥남철수 생생히 기억

버지니아주에 기념비 건립 추진…미 중학생들 가꾼 '38선 정원' 찾아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이렇게 위대한 유산을 남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티븐 옴스테드(85) 예비역 중장은 '아주 특별한 38선'에 서서 벅차오르는 감격에 목이 메이는 듯했다. 65년전 그 혹독한 추위와 고통 속에서 스러져간 전우들의 희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유산'을 남겨놓았는가를 새삼 깨달은 표정이었다.

노병(老兵)의 시계를 1950년 겨울로 되돌린 이 38선은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한국의 38선이 아니다. 같은 위도상에 놓여 있지만, 판문점으로부터 무려 1만1천174㎞나 떨어진 미국 버지니아 주 밀포드 카운티의 캐럴라인 중학교였다.

이 곳에서 중학생들이 손수 가꿔나가는 '38선 기념정원'이 옴스테드 장군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것이었다.

지난달 22일 이 정원 벽돌기증식에 초청된 옴스테드 장군은 자신을 에워싼 중학생들에게 "눈물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 먼지가 할아버지 눈에 들어간거야"라며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 바닥의 벽돌 하나하나를 만지는 손끝은 마치 스러져간 전우들의 손을 더듬는 듯이 아련하고 애틋했다.





장진호 전투의 주역으로 꼽히는 옴스테드 장군은 올해 가장 주목받는 6·25전쟁 참전용사다. 흥남 철수를 초기 배경으로 삼은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 덕분이다. 10만명이 넘는 피란민이 남쪽을 향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옴스테드 장군이 참전했던 장진호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군이 벌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불멸의 동계 전투'로 불린다. 옴스테드 중장은 "개마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추위는 우리의 손과 발 모두 꽝꽝 얼려놓았다"며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극한적 추위였다"고 회고했다.

미 해병 1사단 소속 이병이었던 옴스테드 장군이 북한 원산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이었다. 미 10군단이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38선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는 와중에, 인천에 대기하던 1만5천 명의 해병 1사단 병력이 한반도 남쪽을 한 바퀴 돌아 원산에 상륙한 것이었다. 북한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직접 공략하려는 포석이었다.

그러나 제7보병사단 3천여 명과 한국 카투사 800여 명, 영국 해병 특수부대 200여 명과 함께 진군하던 해병 1사단은 장진호 부근 개마고원 협곡에서 매복 중이던 중공군 제9병단의 12만 명에 의해 포위돼 전멸의 위기를 맞게 됐다.

"중공군의 수가 10배 이상이나 많았고 기온은 갈수록 떨어졌다. 얼어붙은 산 등성이를 오르며 싸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미군들은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8일간에 걸쳐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였다. 참호를 제대로 파지 못해 전우의 시체를 방패삼아야 했을 만큼 처절한 싸움이었다.

"식량보급이 끊어진 가운데 밤새도록 이어지는 교전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침낭 하나 들고 트럭 밑에서 선잠을 자야했다". 안간힘을 쓰던 미 해병 1사단은 공군과 해군의 전폭적 지원 사격 속에서 이중 삼중에 달하던 중공군의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장진호 전투는 '성공한 퇴각 작전'이 됐다. 압도적 수적 우위를 자랑하던 중공군 12만 명의 남하가 지연되면서 지원군이었던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4만여 명, 차량 1천750대,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한 주민 10만여 명이 흥남부두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 특히 전투과정에서 중공군 10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옴스테드 장군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료들의 우애와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분대장급 지휘관들의 통솔력 덕분에 그 어려운 혹한기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흥남 철수장면은 지금도 옴스테드 장군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는 "북한 주민들까지 승선시키자는 결정은 최후의 순간에 내려졌다"며 "친구와 같은 사람들을 그냥 흥남부두에 내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부산과 제주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피란민들은 주로 갑판 위에서 음식과 전기, 물도 없이 지내야 했지만, 자유를 찾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넉넉했다고 옴스테드 장군은 회고했다. "내가 탔던 배에는 모두 2천 명의 피란민들이 타고 있었지만,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배안에서 세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고 그는 전했다.

그처럼 처절한 사투를 겪었기에, 손자뻘도 안되는 미국 중학생들이 꾸미는 '38선 기념정원'은 옴스테드 장군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옴스테드 장군은 "평균 연령 85세인 1세대들이 겪은 일을 2세대와 3세대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하물며 4세대에 속하는 어린 중학생들로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 터인데, 이렇게 스스로 공부하고 깨달아서 기념물까지 조성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보는 일각의 시각을 완강히 부정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흥남을 어렵게 빠져나온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융합돼 이토록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을 보면 결코 잊힌 전쟁이라고 할 수 없다"며 "한국전쟁은 진정으로 승리한 전쟁"이라고 힘을 줬다.

그는 특히 "아이들이 가꾼 이 정원은 우리가 싸웠던 전쟁을 가장 멋지게 상징하고 있다"며 "전쟁의 유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6년 중장으로 예편한 옴스테드 장군이 준비 중인 또 하나의 '유산'은 장진호 기념비다. 다음 달 정전 기념일(7·27)에 즈음해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 해병대 기지 인근 해병대국립박물관 부지 앞에서 착공될 이 기념비의 정식 명칭은 '장진호(초신) 전투에 참전한 유엔군 기념비'.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ちょうしん)을 영어식(Chosin)으로 표현한 것으로, 당시 한반도 지도가 일본어판밖에 없었던 데 따른 것이다.



그는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의 이오지마 전투에 이어 미국 전사 사상 최악의 전투라고 볼려진다"며 "그러나 지금 장진호 전투만이 제대로 된 기념비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단순히 전사(戰史)를 기리는 차원을 넘어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후세들에게 각인하는 매개이자 한·미 동맹을 뜻깊게 상징하는 이정표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게 옴스테드 장군의 염원이다.







[저작권자ⓒ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속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