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체제 구축 요원…"교류 확대하는 일관된 대북정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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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현충원(연합뉴스 자료사진) |
<6·25 65주년> ①끝나지 않은 전쟁…분단을 넘어 통일로
군인·민간인 사상자 400만명…남북 적대적 감정 여전
평화체제 구축 요원…"교류 확대하는 일관된 대북정책 필요"
<※ 편집자주 = 오는 25일이면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이 발발 65년에 됩니다. 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6·25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전협정은 한반도 평화를 보장해주는 문서가 아닌 '발포중지'를 합의한 문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6·25 전쟁 65주년을 맞아 평화체제 이행 및 통일 과제, 남북 간 경제력 격차, 북중 관계 등에 관한 기획물 13꼭지를 일괄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피해 197여만명, 남북한 민간인 피해 249여만명. 6·25전쟁 당시 전사 및 사망, 부상, 실종, 납치, 포로를 모두 합한 군인과 민간인 피해자 수치다.
6·25전쟁은 400만명에 달하는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군인보다 민간인 피해가 더 심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커지면서 양민 학살 등이 대규모로 자행됐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북한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 군인보다 민간인 피해가 더 컸던 참혹한 전쟁
민족 최대의 비극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이북의 북한군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8~9월 총공세를 필사적으로 버텨냈고, 급기야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북상을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9일 38선을 넘고, 10월 26일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격해 전쟁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 내주고 말았다.
이후 평택-충주-삼척을 축으로 전선을 구축한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해 그해 3월 중순 다시 서울을 회복한 뒤 지금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 정부는 참전국들과의 협의를 거쳐 휴전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51년 5월 31일 미국은 조지 케넌 전 국무부 실장을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내 휴전 가능성을 타진했고 이후 휴전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공식적인 휴전회담의 시작은 7월 10일 개성 근교 내봉장에서 열린 정전협상 1차 본회의였다. 보름 뒤 열린 10차 본회의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 비무장지대(DMZ)와 군사분계선(MDL) 설치 ▲ 정전 이행을 위한 군사정전위원회와 사찰·감시기구의 설립 ▲ 전쟁포로에 관한 제반 절차 ▲ 외국군대 철수를 다룰 정치회담 등 협상 의제에 합의했다.
휴전협정의 최대 난제는 전쟁포로 교환 문제였다.
양측은 1952년 4월 28일부터 53년 6월 6일까지 1년 이상 전쟁포로 교환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 협상을 했다.
남북이 전향 포로를 석방한 이후인 1953년 7월 19일 158차 본회의에서 휴전회담은 최종 타결됐다. 같은 달 27일 유엔군 수석대표인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공산군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 불안한 정전체제, 평화체제 전환노력 빈번히 물거품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부터 시작됐다.
정치적 협상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취지로 1954년 제네바에서 남북한과 미국, 소련, 중국 등이 참여하는 정치회담이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87일 만에 막을 내렸다.
결국, 한반도의 평화는 정전협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지만, 남북 양측의 정전협정 준수 의지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남북이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비무장지대(DMZ)에 중화기를 배치하기까지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정전 이후 1994년 4월 말까지 정전협정 위반건수는 42만5천271건에 달한다. 1994년 4월 말 이후로는 유엔군사령부가 별도로 위반 사례를 집계하지 않아 자료가 없는 상태다.
북한의 잇따른 군사적 도발로 한반도에서 전쟁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한 정전체제를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1990년대 들어 다시 본격화했다.
1992년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 1장5조는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는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며 평화체제 이행 과제를 명시했다.
1996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을 위한 4자 회담(남·북·미·중)이 정식 제안됐고, 이듬해 미국에서 4자 회담이 한차례 열리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단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첫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현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직접 관련된 3자 혹은 4자 정상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 남북 간 깊은 불신의 골…"교류·협력으로 극복해야"
이러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에도 한반도에서의 대결구도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는 남북 상호 간에 불신의 골이 여전히 깊기 때문이다.
남북기본합의서와 6·15남북공동선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 등 기존 남북 합의서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틀이 마련돼 있으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체제안보'를 명분으로 북한이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집착하는 것도 한반도 평화 논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의 길로 나아가려면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나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교 교수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평화체제로 가려면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지속적이면서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이 필요하다"며 "정권의 이해관계나 보수-진보의 편향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집권해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 정권교체에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1990년 냉전해제 과정에서 통일을 이룬 독일은 분단 극복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서독과 동독은 통일 직전까지 매년 수백만 명이 왕래할 정도로 상호 교류·협력이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이 허용되지 않는 국내외 정세에서 분단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방책은 독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선 남북관계를 개선해 남과 북이 서로 오가고 돕고 나누며, 분단의 고통과 피해를 줄이고, 정치적 통일은 안 됐지만 경제·사회적으로 통일된 것과 비슷한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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