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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물어 가는 휴전선의 밤 (철원=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연말을 맞아 강원 철원군 중부전선에서 육군 6사단 병사가 순찰로를 이동하고 있다. 2014.12.25 dmz@yna.co.kr |
<광복70년> 휴전선에 가로막힌 남북…마지막 남은 분단국
"통 큰 접근 필요"…남북 정상회담 위한 특사교환 고려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영만 기자 = 1990년 독일과 예멘의 통일로 한반도는 지구 상에서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가 됐다.
2차 세계대전 후 대립이 첨예한 동서 냉전 속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는 허리 부분이 잘려 남과 북으로 두 동강났다.
남한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근간으로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택해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남과 북은 서쪽 예성강에서 동쪽 강원 고성에 이르기까지 250㎞의 군사분계선(MDL)으로 가로막혀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휴전선이다.
양측의 군사 충돌을 막기 위해 휴전선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2km의 완충지인 비무장지대(DMZ)가 설치됐다.
비무장지대는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채 오랫동안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 지구촌 유일 분단국…한반도 두 동강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옛 소련과 미국 측에 의해 분할 통치되면서 동과 서로 분단됐다가 45년 만인 1990년 10월 3일에 통일됐다.
옛 소련의 개방과 동유럽 민주화의 영향을 받아 통일 1년 전에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베를린 장벽은 미국과 옛 소련을 두 축으로 한 냉전의 상징이었다.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 있는 남·북 예멘은 1990년 5월 22일 통일을 선언했다.
예멘은 사회주의 국가인 남예멘과 보수 비동맹국인 북예멘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나라의 통일로 이제 지구촌 분단국가는 한반도뿐이다.
한반도 분단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한반도 남쪽에 미군, 북쪽에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면서 38선이 생겨났다.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그어진 38선은 애초 미·소 양국의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으로 설정됐지만, 극심한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70년 분단'의 민족적 비극이 돼 버렸다.
38선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휴전선이 됐다.
휴전선은 38선보다 서쪽이 아래로 내려왔고, 동쪽은 위로 올라갔다.
정전 협정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 치의 땅을 더 차지하려고 남북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결과다.
이후 남한은 쿠데타와 군사정권, 권위주의 정치, 민주화 등을 거쳐 경제적 도약을 이뤘고, 북한은 김일성(1994년 7월 8일 사망)과 김정일(2011년 12월 17일 사망)에 이어 김정은이 집권해 3대 세습 체제를 굳히고 있다.
◇ 남북 긴장 고조-완화 '반복'
남북 긴장 고조와 완화의 파고가 최근까지 반복되는 등 남북관계는 냉·온탕을 오갔다.
1970년 이전에는 북한 무장공비가 자주 출몰, 남한 사회를 불안하게 했다.
1968년 1월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과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서울 시내까지 침투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발각돼 미수에 그쳤다.
120명의 무장공비가 유격대 활동과 민중 봉기 거점을 마련하려고 울진·삼척 일원에 침투했다가 58일 만에 국군 등에 의해 소탕됐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미얀마(옛 버마) 아웅산 폭탄테러,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때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이 도끼와 몽둥이로 공격해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다.
미군 등은 우리 측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던 중이었다.
아웅산 폭탄테러는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때 북한의 폭탄 테러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17명의 외교사절과 수행원이 숨진 사건을 말한다.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미얀마 해역 상공에서 김현희 등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된 사건이다.
그때 승객 95명과 승무원 20명 등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북한은 이 사건으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돼 각종 제재를 받았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북한의 무력 도발이 최근에까지도 끊이지 않아 대치 상황의 긴장 지수가 높아지곤 했다.
또 북한은 2003년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고 2006년, 2009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해 미국 등 서방 세계를 잔뜩 긴장하게 했다.
이런 긴장을 누그러뜨리려는 노력도 적지 않았다.
특히 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만남은 긴장 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4년간 부정기적으로 진행됐다.
1985년 남북한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한 지 15년 만인 2000년 8월에 첫 상봉이 성사됐다.
이후 2014년 2월 20∼25일까지 이산가족 상봉은 모두 19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만남 장소는 금강산 일대가 주를 이뤘다.
2005년 8월에 시작된 이산가족 화상 상봉도 2007년 11월까지 7차례나 진행됐다.
남북관계 개선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는 우리 정부가 북측에 요청했으나 아직 성사되지 않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도 긴장을 낮추는 데 한몫했다.
정 회장은 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휴전선에 가로막혀 통행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육로를 통해 소들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국내외적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방북 때 김일성 주석을 만나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채택, 금강산 관광을 통해 남북 경제협력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에다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의 정상회담, 개성공단 내 남한 기업 운영, 인도적 물자 지원,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구성 등 스포츠 교류도 긴장도를 낮춰 양측 협력과 화해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숱한 남북 회담…남북, 통일 시각차 여전
1960년대 이전에도 남북 회담이 간헐적으로 열리긴 했으나 냉전 탓에 활발하지 못했다.
전 세계 긴장완화 분위기에 힘입어 70년대 이후에는 적십자, 고위급, 국회, 군사, 경제, 체육 등 각급 회담이 숱하게 열렸다.
그러나 실천이 뒤따르지 않아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다.
북한은 남한을 혁명전략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남한은 정권안보 차원에서 남북문제에 접근하려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일본 해양세력과 중국·러시아 대륙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국제적 역학관계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도 성과 부진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남북이 합의해 통일 이정표를 제시한 역사적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7·4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이다.
7·4 공동성명은 남북이 분단 후 처음으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한 성명이다.
1972년 7월 4일에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 통일 3원칙과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직통전화 설치 등이 담겼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이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 방문해 회담한 끝에 이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 3원칙은 통일의 기준이 되었지만, 남한과 북한 정부가 이 성명을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는 바람에 더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정상의 역사적인 만남으로 채택된 6·15 공동선언은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해 7·4 공동성명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또 남측이 제안한 '연합'과 북측이 제안한 '낮은 단계의 연방'에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등 인도적 문제 조속 해결, 남북 경제 협력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사회·문화·체육 등 협력과 교류 활성화 등의 내용도 담고 있다.
두 차례의 합의에도 북한은 한미 동맹과 합동군사훈련을 비난하며 세 차례나 핵실험을 강행하고 미사일과 포를 발사하는 등 무력 도발을 일삼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남한은 핵개발 중단 촉구와 함께 남북 교류 등 인도적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처럼 통일과 주변 정세를 바라보는 남북 간 입장 차가 여전히 커 통일로 향한 걸음은 분단 70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분단 70주년 갈등과 협력의 남북 관계사에서 갈등은 길었고 협력은 짧았다"면서 "남북 당국 간 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신을 신뢰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또 "남북 두 지도자는 광복 70주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공감하지만, 함께 해야 할 분단 극복에는 자신의 길만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한은 이산가족 상봉,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에 비중을 두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이 둘을 아우르는 남북회담을 제의하는 등 '통 큰 접근'이 필요하다"며 "정상회담을 위한 특사 교환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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