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한(限)에서 흥(興)으로…시대와 함께 한 대중문화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6-16 07: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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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설움'에서 '강남스타일'까지
△ <광복 70년> 대중문화 70년 (서울=연합뉴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 말과 노래도 해방되자 대중문화는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웠다. 70년을 담금질한 대중문화는 지금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의 첨병으로 K-웨이브를 이끌고 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과 함께 시작된 1960년대는 대중문화가 가요를 중심으로 싹을 틔우던 시기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최희준, 현미, 패티김 등 미8군쇼 출신 가수들이 한 축을 담당하며 다채로운 장르가 출현했다. 사진은 원로가수 한명숙 씨의 군 위문공연 시절 모습. 2015.6.16 <<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연합뉴스DB >> photo@yna.co.kr

<광복70년> 한(限)에서 흥(興)으로…시대와 함께 한 대중문화

'나그네 설움'에서 '강남스타일'까지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떠도는 나그네였고 그래서 서러웠다.

'타관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2절·1940년)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 선생이 당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취조당하고 나오며 느낀 심정을 담뱃갑에 적어내려 간 가사다.

나라를 빼앗긴 비통함은 이렇게 절절한 노랫말에 터져 나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1936)을 읊조리며,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한복남의 '빈대떡 신사'·1943)라고 흥얼거리며 시대의 핍박을 이겨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 말과 노래도 해방되자 대중문화는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며 서민의 한과 흥의 정서를 오롯이 담아냈다.

한국전쟁과 분단, 근대화, 민주화 등 굵직한 격동기를 거치며 때론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때론 시대에 맞서 철퇴를 맞았다.

한민족의 삶 속에서 70년을 담금질한 대중문화는 지금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의 첨병으로 K-웨이브를 이끌고 있다.

1960·70년대를 대표한 트로이카 배우들, 시청률 60~70%를 기록한 히트 드라마들,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이 있었기에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지금의 한류 실크로드가 열렸다.

'강남스타일'로 세계인을 춤추게 한 싸이, 일본 한류의 씨앗을 뿌린 드라마 '겨울연가'와 배용준, 중국을 강타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김수현이 있는 이유다.

◇ 아픔을 이겨내고…해방공간과 분단 이후(1945~1960년대)

해방 공간에서는 남인수의 '가거라 38선'과 현인의 '신라의 달밤' 등이 널리 불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수들은 군예대에 편성돼 '군번 없는 용사'로 전장을 누비며 위문 공연을 펼쳤다.

포성과 화약 냄새 가득한 한반도에는 현인의 '전우여 잘자라' 같은 진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은 '1.4 후퇴' 때의 일화가 담긴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의 기억이 서린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작사가 반야월이 전쟁 당시 어린 딸을 잃은 아픔으로 쓴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실향민을 위한 망향가인 한정무의 '꿈에 본 내고향' 등을 라디오와 축음기로 들으며 애환을 달랬다.

4·19혁명, 5·16군사정변과 함께 시작된 1960년대는 대중문화가 가요를 중심으로 싹을 틔우던 시기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최희준, 현미, 패티김 등 미 8군쇼 출신 가수들이 한 축을 담당하며 다채로운 장르가 출현했다.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트로트의 흐름을 이었고, 키보이스·애드포 등 그룹 사운드가 등장했으며, 번안 가요 붐과 함께 1960년대 말 음악감상실 세시봉을 중심으로 트윈폴리오 등 포크 뮤지션들이 흐름을 형성했다.

특히 라디오의 대중화와 함께 TV 시대가 열리며 대중문화는 TV와 함께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1년 KBS, 1964년 TBC, 1969년 MBC TV 등이 잇달아 개국했다.

TV 드라마 시대가 막이 오르며 단막극과 일일연속극들이 방송됐으며 구봉서·배삼룡·서영춘 등의 코미디언들이 브라운관에서 프로그램의 한 축을 담당하며 곤궁했던 서민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영화계에선 문희·윤정희·남정임이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고, 이들과 호흡을 맞춘 신성일이 (부인) 엄앵란과도 콤비를 이루며 청춘영화의 붐을 이끌었다.

◇ 빛과 그림자…군사정권 시대, 청년문화 낭만 공존(1970~1980년대)

1970~80년대는 대중문화계의 빛과 그림자가 뚜렷했다.

군사정권이 섹스·스포츠·스크린을 뜻하는 '3S'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대중문화는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커 나갔다. 반면 권위주의 정권과 충돌하며 규제를 받기도 했다. 눈부신 경제 발전 속에서 청년문화의 낭만도 공존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진이 1971년 복귀하자 나훈아와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표하는 '빅 라이벌'로 트로트 붐을 재현했다.

또 청바지·통기타·생맥주를 뜻하는 '청통맥' 청년문화가 꽃피면서 윤형주, 송창식, 어니언스, 양희은 등 포크 가수들의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키보이스, 히식스, 데블스 등 그룹사운드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청년문화는 대마초 파동에 휩쓸린 가수들의 방송·음반 활동 금지, 공연윤리위원회의 대중가요 대량 금지 등의 규제로 이어졌다.

대신 MBC가 1977년 시작한 '대학가요제'를 위시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 등이 또 다른 형태의 청년문화 붐을 이끌었다.

스크린에서도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고교 얄개' 시리즈, '영자의 전성시대' 등이 청춘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들 작품에는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며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여러 사회 문제를 낳던 사회상이 스며들었다.

또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최루성 신파영화가 인기를 끌었으며 장미희·정윤희·유지인은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다.

스타 영화인 부부인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가 1978년 홍콩에서 납북돼 남북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안방극장에선 '아씨', '여로', '새엄마' 등의 드라마가 히트작이었다. 이들 드라마가 방송될 때면 거리가 한산했고, 시청 전 '문단속 잘하고 수도꼭지 잠근 후 시청하라'는 안내 문구가 나오기도 했다.

1981년 컬러TV 방송이 시작되면서는 본격적으로 TV 전성시대가 열렸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을 거치며 영상 기술의 발전도 한몫했다.

드라마 '달동네'는 67%, '사랑과 야망'은 76%(이상 방송사 기록)로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청춘물인 '사랑이 꽃피는 나무'와 '고교생 일기', 홈드라마인 '한지붕 세가족' 등 장르도 다채로워졌다.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가 안방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고 주제곡인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와 당시 신인 가수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애통한 마음을 위로했다.

가요계에선 조용필이란 국민적인 스타가 탄생했으며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이문세, 이승철, 변진섭, 주현미 등이 활동하며 댄스, 발라드, 록, 트로트 등의 장르가 고루 인기를 끌었다.

스크린에선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과 '깊고 푸른 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과 '씨받이' 등이 사랑받았다. '씨받이'의 여배우 강수연이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아 화제였다.

◇ 르네상스…세계적인 브랜드, 한류(1990~2000년대)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대중문화의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연예 산업의 성장과 함께 지금의 한류 스타들을 배출한 직접적인 토대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신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하며 개성 강한 X세대를 비롯해 화려한 소비 생활을 하는 오렌지족, 야타족 등이 생겨나며 청소년 문화가 대두됐다.

가요계는 이와 맥을 같이하며 황금기를 누렸다. 1992년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난 알아요')을 부른 서태지와아이들의 등장은 음악 혁명으로 불렸고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으로 격상됐다.

신승훈, 김건모, 이승환, 신해철, 강수지, 듀스, 룰라 등이 큰 인기를 끌며 발라드, 록, 댄스, 랩, 테크노 등 장르가 대폭 확장됐다.

이들 노래는 1990년대 초 노래방 문화 탄생과 함께 널리 불렸고 신승훈, 김건모 등 앨범 판매량 100만장을 돌파하는 밀리언셀러 가수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또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 등 1세대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고 10~20대 주축의 팬클럽은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팬 문화를 만들어냈다.

1991년 민방인 SBS TV가 개국하고 1995년 케이블 TV가 출범하며 쇼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 시청자를 사로잡은 히트 상품이 쏟아졌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과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의 시대극과 '사랑이 뭐길래'와 '딸 부잣집' 등의 가족 드라마, '질투', '마지막 승부', '첫사랑' 등의 청춘 멜로 드라마, '용의 눈물' 등의 사극까지 사랑받았다.

극장에서는 홍콩 누아르 영화의 강세 속에서도 '장군의 아들', '남부군', '경마장 가는 길', '하얀전쟁', '서편제', '접속', '초록물고기', '미술관 옆 동물원', '박하사탕' 등이 잇달아 흥행했다.

특히 1999년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 '쉬리'의 성공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태동이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대중문화가 '한류'라는 브랜드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다.

배용준의 '겨울연가'와 이영애의 '대장금' 등의 드라마가 일본 시장을 강타했고, 그 흐름은 지난해 김수현과 전지현의 '별에서 온 그대'의 중국 열풍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한류의 바통을 받은 건 K팝이었다.

H.O.T로 점화된 아이돌 그룹의 댄스 음악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 북미, 남미, 중동 등지로 세를 확장했다.

동방신기, 빅뱅, JYJ,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엑소 등 아이돌 그룹이 해외 시장을 누볐고, 싸이는 '강남스타일'로 미국 빌보드의 벽을 넘으며 월드스타로 탄생했다.

영화계도 해외 시장에서 이름을 드높였다.

임권택이 일궈놓은 세계 영화제에서 박찬욱, 이창동, 김기덕, 홍상수 등의 감독들이 세계 3대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배우 전도연은 '칸의 여왕'이 됐고 이병헌은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대중문화를 연구해온 평론가 박성서 씨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한 한류 붐은 비단 어제오늘의 성과가 아니라 지난 70년 세월에 걸쳐 이어온 우리 대중문화의 저력이자 큰 흐름이라 할 수 있다"며 "동시에 역경 속에서 자라온 우리 대중문화 역사가 미래의 희망을 얘기해주는 실증적 사례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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