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역사 수정주의 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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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이 명예교수가 2014년 1월 11일 일본 도쿄도(東京都)의 재일본 한국YMCA회관에서 열린 '요시미재판 함께 행동' 발족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가와타 후미코 씨 제공) |
<한일수교 50년 전문가 제언> ② 아라이 일본전쟁책임센터 대표
"전쟁·식민지지배 반성 통한 화해가 유일한 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역사 수정주의 잉태"
(도쿄=연합뉴스) 김용수 특파원 = "같은 과거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려면 전쟁과 식민지 지배 반성에서 시작하는 화해 밖에 없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일본의 전쟁책임 규명과 전후보상 운동을 이끌어온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89)스루가다이(駿河台)대학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올여름 발표할 '전후 70년 담화'가 한일 화해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할 뿐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특히 "최근에는 1국 중심적인 내셔널리즘에 포퓰리즘 경향이 가세하면서 역사 문제가 근린제국과의 관계를 긴장시키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주변국들의 반발이 증폭되고 있는 것은 역사 문제를 공동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사와 통합적인 역사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역사학자인 아라이 교수는 1993년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를 만들면서 동시에 대표를 맡았다. 그가 지금도 대표로 있는 이 센터가 간행해온 계간지 `전쟁책임연구'는 82호를 넘어섰다.
아라이 교수는 한일 간에 아직 청산되지 않은 전후보상 문제에 대해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는 1982년부터 나도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나도 당사자며 전쟁책임센터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 일본에서 오랫동안 전후보상 운동 등에 관여해온 입장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지켜보는 소감은.
▲한국과 일본이 50년 전 국교를 정상화했을 당시 `냉전구조'가 기본적인 틀로 작용해 미국의 적극적인 관여와 압력이 존재했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이 식민지 시대의 범죄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에드윈 라이샤워 당시 주일 미국대사는 "도량의 크기를 보여주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뭔가의 사죄"라고 강하게 일본을 설득했다.
그 결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무상이 1965년 2월 방한했을 때 담화 형식으로 과거의 `불행한 관계'에 대해 유감과 반성의 뜻을 표시했지만 한국 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일본 측이 미국의 압력을 이처럼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강력히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공헌'을 강하게 희망한 점도 큰 이유가 돼 식민지주의청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냉전구조의 탈피와 함께 21세기가 돼서도 `살아있는 역사'로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됐다.
수교 50년을 돌아보면서 높게 평가하고 싶은 것은 2010년 8월 10일 발표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한국병합 100년에 관한 총리담화'다. 이 담화는 `그 의사에 반해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으로, 간접적이지만 한일병합조약의 무효 원인인 강제성을 일본 총리가 인정한 것이다.
간 총리 담화는 동시에 일본 통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던 왕실의궤 등'의 귀중도서 반환을 약속했다. 과거 청산을 둘러싼 정치 책임자의 사죄에서는 말 뿐만 아니라 일정한 상징적 `퍼포먼스'를 하는 국제적인 사례가 많다. 귀중도서의 반환은 여기에 해당한다.
만약 현재의 냉각된 한일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개최하려 한다면 총리의 말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치적 언어(상징)로서 일정한 퍼포먼스가 수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쿠라(小倉) 컬렉션'의 반환 같은 것이다. 어찌 됐던 쌍방이 지혜를 짜내 다양한 타개책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한일 양국은국교정상화 50년이 지났음에도 과거사, 역사 인식 문제 등으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
▲한일국교 정상화 후 50년 동안 식민지 지배 청산이라는 핵심 문제에 대해 과연 양국의 간극이 메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담화는 일본이 `식민지지배와 침략에 의해' 아시아인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사실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
무라야마담화는 한일관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나 1998년 10월 방일한 김대중 대롱령과의 회담에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는 `(일본이) 과거의 한 시기에 한국 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의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 이것이 한일파트너십공동선언이다.
여기에 `일본 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의해 조선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북일평양선언(2002년 9월)을 감안하면 여러 가지 한계는 있지만 냉전 종결 후에는 일본도 몇 차례는 식민지 가해책임에 대한 `정치 합의'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것이 정착되지 않은 것은 21세기 들어서부터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역대 내각이 단명으로 끝나고 정치 합의를 뒤엎는 것 같은 정치가의 실언, 망언이 잇따른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치) 불안정에 대한 대책으로 소선구제를 도입한 것이 거꾸로 민의를 반영하지 않는 강력한 정권을 탄생시키는 등 보수 정치의 일탈이 계속되는 상황이 됐다.
-- 일본군 위안부, 노무자 강제동원 문제 등 한일 간에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전후보상 문제가 있다.
▲강제노동, 위안부 문제는 내가 오래 전에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문제로 그런 의미에서 나도 당사자다. 전쟁책임자료센터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센터의 기관지인 `계간 전쟁책임연구'발행도 82호를 넘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분석과 제안이 있으니 꼭 읽어봐 달라.
위안부 문제에서는 아시아여성기금 문제가 있다. 여성기금의 최대 문제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한 데 있다. 나는 한때 여성기금의 대표를 맡았던 무라야마 전 총리를 만나 이러한 문제를 확인한 후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와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법률을 추진하려 했다. 사전에 한국 관계자에게원안을 보여주고 양해를 얻은 후에 법안을 만들었다. 법안은 4당 공동제안으로 국회에 제출됐지만 우리들의 역부족 등으로 유감스럽게 법률 제정까지는 가지 못했다.
-- 아베 정권은 올여름 `전후70년 담화'를 발표할 예정이다. 최근의 아베 정권 역사인식은 무라야마 담화 등을 무력화하려는 역사수정주의로 비판받고 있다.
▲ 나는 역사 연구자이기 때문에 장래의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문 영역밖이다. 다만 내가 최근 절감하는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정체(停滯)가 역사문제를 오로지 국민통합의 문제로 다루는 내향적인 경향을 일본의 정치사회에 현재화시킨 점이다. 이것이 1990년대 말부터 표면화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기반이 됐다.
최근에는 1국 중심적인 내셔널리즘에 포퓰리즘 경향이 가세해 역사문제가 근린제국과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요인이 됐다.근린제국과의 관계에서 역사문제가 얽혀 있는 것은 일본과 근린제국의 관계가70년 전에 끝난 전쟁과 식민지지배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같은 과거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식민지 지배 반성에서 시작하는 화해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나는 아베 정권의 `전후70년 담화'가 근린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될지 어떨지, 이 담화가 화해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 최근에는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정권의 `정치합의'가 존중되지 않는 것 같다.
▲ 일반적으로 전후 일본의 정책 결정에는 관료제의 영향력이 컸다. 관료제는 행정조직을 종적으로 분할해 권한과 책임도 분할한다. 70년대 들어 외교와 같은 고차원의 정책결정에 총리관저가 적극 관여해 관료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책 결정을 이끄는 사례가 생겨났다. 중일관계에서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의 정치 수법이 그 예다. 90년대의 무라야마 총리도 마찬가지다.
무라야마 담화나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 같은 정치문서에 들어 있는 국가 간 합의는 고도의 정치 관여와 리더십의 산물이다. 그러나 금세기 들어 자민당이 단독으로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여당의 통치 능력은 떨어졌다. 이러는 사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문부성도, 외무성도 위와 같은 정치 합의를 언뜻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실질적으로는 겉치레 대응으로 형해화 시켜 왔다.
그 결과 역사문제를 공동 해결하려는 강한 정치적 의사와 통합적인 역사 정책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채 주변제국의 반발과 불신을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설명처럼 역사문제를 사적인 신조로 매몰시키는 정치 수법은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지향을 확대시켜 근린제국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일본의 고립을 막기 위해서는 역사문제에 대해 공유해온 정치적 축적과 정치 자산을 재음미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의 해결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아라이 신이치 = 1926년 도쿄 출생. 45년 학도병으로 종군.도쿄대문학부 졸업후 고교 교사 등을 거쳐 74∼91년 이바라키(茨城)대학 교수(서양사)로 강단에 섬. 그후 스루가다이(駿河台)대학 경제학부 교수(역사학)를 역임한 후 2001년 퇴직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1993년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 설립과 동시에 이 센터 대표를 맡은 후 지금까지도 대표로 활약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한국, 조선 문화재 반환문제 협의회 대표도 맡고 있다.
저서로 `제2차세계대전'(1973년), `일본의 패전'(1988년), `전쟁책임론'(1995년),`역사 화해는 가능한가'(2006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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