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반지 팔아 독립운동 자금 댄 통영 기생 '막래'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2-26 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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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3·1운동 판결문 자료집 남부지역편 발간

금반지 팔아 독립운동 자금 댄 통영 기생 '막래'

국가기록원, 3·1운동 판결문 자료집 남부지역편 발간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기생 조합소에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 모아 피고들과 행동을 같이할 것을 권유하여, 그 동의를 얻어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하고, 피고 막래(莫來)는 가지고 있던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장용(喪章用) 핀과 초혜(草鞋)를 사서 이를 다른 기생에게 나누어 주며 같은 복장을 하게 한 후 기생 조합소에서 동일 오후 3시 반경, 통영면 부도정의시장으로 행렬을 지어 걷기 시작하고 피고 2명은 경찰관의 제지에 응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1919년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의 판결문)

1919년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기생 정막래(丁莫來·21)와 이소선(李小先·20)의 판결문은 3·1운동 당시 국권을 되찾으려는 민족적 열망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정막래와 이소선은 금반지와 금비녀를 팔아 같은 옷차림을 하고 수천명에 앞장서 독립을 외쳤다.

당시 식민지 법원은 정막래에게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0대 소년들도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1919년 4월 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 갔을 때 윤수선(尹秀善)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金性善)과 강덕수(姜德壽)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尹且岩)과 박소수(朴小守)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략)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朴且用)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조선독립만세를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의 도로를 열을 지어 걸었다."(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

판결문의 주인공인 윤수선, 윤차암, 강덕수, 박소수 등은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 즉 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15세 소년이었다.

3·1절을 앞두고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발간한 국가기록원은 "판결문에 나타난 독립만세시위는 거족적인 운동이었다"며 "판결문의 주인공들은 연령, 종교, 신분, 남녀를 불문하고 연대해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천명까지 만세운동의 행렬을 이뤘다"고 26일 설명했다.

이번 자료집은 지난해 중부지역(경기·강원·충청) 판결문에 이어 영남·호남·제주 등 남부지방의 3·1운동 양상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판결문 원문 50건(286)을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이번 자료집의 판결문 외에도 독립운동 판결문의 원문과 번역문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archives.go.kr)의 '독립운동 관련 컬렉션'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인명·지역·죄명으로도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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