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용호 사무총장, 나는 트리플 브라운이다 Triple Brown

김민석 기자 / 기사승인 : 2025-06-01 16: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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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태생, 이단종교장로, 고졸학력

▲ 전국기자협회 국용호 사무총장

 

세상에 태어나서 60년 넘게 살면서 마음 한번 편하게 살아본적 없다. 이런 인생이 얼마나 한 스럽고 외로운 인생이었을까? 누구와도 상의를 해 본적이 없다. 오로지 혼자서 이겨내고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꿈도 컸다. 구의원도 출마해보고 구청장도 꿈을 꿔보고 국회의원도 해보겠다고 하고 대통령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기자협회 사무총장으로 평범하게 하던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좋은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인생여정을 적어본다.

 

1. 태어난 곳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548번지에서 1964년 8월 24일(음력) 오전 11시쯤 아버지 국중엽(1940년생)과 어머니 장금자(1942년생)씨 사이에서 4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태몽을 꾸셨는데 냇가에서 용 두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시고 이것을 아버지에게 말씀하셔서 용호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용(龍)호(虎)인 줄 알고 살았는데 고등학교 졸업할 때 쯤 龍(용용)虎(범호)가 아니고 鏞(큰쇠북용) 鎬(빛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고 81년 겨울에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려서부터 사회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향을 물어보고 사는 곳을 물어보는데 이때부터 브라운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향이 전라도라는 것만으로도 소외되는 생활, 핍박과 말도 않되는 말로 사람을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전라도 새끼들은 깽깽이라는 등 빨갱이라는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548번지라고 답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에 누군가 고향을 물어봐서 전주 근처가 완주군이어서 전주라고 이야기했는데 전주 어디냐고 물어봐서 주소까지 말을 했다.

 

내가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은 기정사실이다 지금까지 어디를 가서라도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말을 했다.

 

2. 다락방과 신천지 장로 

 

나의 신앙생활은 군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접해본 것은 군대에 가서 하급 병인 군종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27사단 포병연대 8032부대로 입대를 하였는데 포병 사수로 근무 중이었는데 오랫동안 하급병 들어오지 않아 골치 아픈 생활을 1년 동안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하급병이 들어왔는데 교회 다니는 군종이 들어온 것이다. 쉬는 날 일을 같이 하려고 하면 교회를 가야한다고 빠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군종은 나에게 핍박을 많이 받았다. 군종에게 하나님이 높은 지 고참이 높은 지 가끔 물어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 군종은 무척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을 사회에 나와서 교회를 다니고붙터 알게 되었다. 그 후에 회개도 많이 했다. 훗날 그 군종을 만나 미안하다고 사죄도 했다. 그때 그 군종은 나를 위해 많이 기도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신앙을 했나보다 하고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아내를 만나서 시작된 신앙생활, 아내를 만났을 때 아내는 소원이 있다고 하였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어머니의 기도제목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아내가 너무나 예쁘고 좋아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하면서 아내와 결혼을 하고 동시에 신앙생활도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정통교단에서 시작하여 다락방교회로 다락방교회에서 장로로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신천지예수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다락방도 이단이라고 핍박을 받았지만 신천지는 더 심한 이단이라고 핍박을 받았다. 수많은 사연이 있지만 종교탄압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나는 그래도 떳떳하게 사람들에게 신천지장로라고 말을 했지만 아직도 많은 신천지 성도들은 숨어서 신앙을 할 정도이다. 정말로 나라가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용도변경, 건축허가, 건물임대, 행사 장소 대관 등 아직도 편견과 오해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더 심해져가고 있다. 정치가 둘로 갈라지고 있듯이 종교도 갈기갈기 찢어지고 갈라지고 있다.  

 

이는 심히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본다. 극단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하여 더욱 심해졌다고 본다. 신천지도 통일교도, 하나님의교회도, 제칠일안식교도, 원불교도, 이슬람도, 힌두교도, 기독교도, 천주교도, 불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은 왜일까? 무엇인가? 대한민국이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인데 실제로 살아보면 종교의 자유는 없는 것이다. 나와 다른 종교는 이단이라는 미명하에 사람 취급도 안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권이나 공무원들은 알고 대처해야 한다. 하루 빨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

 

나는 신천지 장로로서 15년을 생활을 했다. 한 번도 누구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떳떳한 사람이다. 손해를 보고 피해를 많이 보았지만 그냥 삼키고 넘겼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몇 명이 없다.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없어지도록 우리 국민들이 협조를 해 주셔야한다. 

 

3. 고졸학력

지금 대통령선거가 한참 진행 중이다. 누군가가 고졸학력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방하는 문제가 발생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고졸학력으로 대통령까지 했지만 어떠했는가? 고졸학력은 옛날에는 많이 있었지만 선진국으로 가면서 많이 줄었다. 지금은 소수의 사람들이 고졸학력을 유지하고 아니면 방송통신대나 사이버대학 등 고졸학력을 지우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70년 3월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삼기국민학교에 입하가하여 71년 대아리국민학교로 이전해간다 당시 대아리국민학교가 새로 생기는 바람에 모두가 이전한 것이다. 76년 3월 고산중학교로 가게 되고 79년 군산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공부는 열심히 하였지만 고등학교 2학년에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인한 어려움으로 공부는 뒷전으로 하면서 노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1년 겨울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려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가고 싶은 대학은 중앙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꿈으로 남아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에 들어가고자 한다거나 교회에서 장로가 된다거나 정치를 할 때나 고졸학력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회는 그렇게 차별을 받고 사는 곳이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차별하는 사람이 잘못일까? 차별받는 사람이 잘못일까? 이는 앞으로 누군가가 해결해 가야하는 문제일 것이다. 자식들에게도 대학을 선택할 때 편하게 하라고 하였다 앞으로 너의 인생은 네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고졸학력이지만 할 일 못해본적은 없다. 다만 차별을 받았을 뿐 하고싶은 것은 다 했다고 본다. 60평생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능력을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세상이다. 앞으로 무엇인가 하게 된다면 능력을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대학 졸업이 전부가 아니라 능력대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이력서에 대학졸업이 없어도 직장을 떳떳하게 들어가고 대기업도 들어가는 그런 세상 말이다.

 

결론을 맺고자한다.

사람이 사람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지금 커밍아웃을 한다. 누군가 나에게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감수하겠다. 나는 누가 뭐래도 트리플 브라운이다 다른 말로 하면 트리플 마이너인 셈이다. 혹시라도 저와 같은 트리플 브라운 여러분이 계시다면 지금부터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 수 있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떳떳하게 돌진하시길 바랍니다. 트리플 브라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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