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하고 건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알코올 기운에 절어 살점하나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빠가 광주에서 시골로 다시 돌아간 지 두 달 정도 되던 어느 날.그날은 마침 1년에 한 번씩 가족들이 모이는 엄마의 생일이자 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우리들에게는 1년 중 가장 의미가 큰 ‘가족의날’ 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뜻 깊은 날 큰오빠는 식구들 앞에서 쓰러졌다. 급히 가까운 시골 병원으로 실려 간 큰오빠는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받고 다시 광주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단 1퍼센트도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야속한 병원 측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실날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날 작은오빠의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큰오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자 병원으로 갔던 가족 중에서 큰올케와 작은오빠만이 돌아왔다.
“큰오빠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큰오빠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병인 만성 당뇨와 합병증으로 큰오빠는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나중에 큰올케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큰오빠는 죽기 두달 전부터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4홉들이 소주를 2병씩이나 마셨다고 한다.
이미 간은 굳어 있었고, 지병인 만성 당뇨에 합병증까지 겹쳐 그만생명의 줄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비록 생명의 불이 꺼져 가고 있었음에도 큰오빠는 끝까지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가족들을 한자리에서 모두 본 이후 쓰러진 것이었다.
식구들은 평생 가난을 원망하며 발버둥 쳤던 큰오빠의 주검 앞에서 절규했다. 한편으로는 큰오빠의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또 한편으로는 쉽게 가시지 않는 집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 야속해서 그렇게 울부짖었다.
남편의 주정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올케는 그 이후 집을 나가버렸다. 큰오빠가 우리 집안에 남긴 것은 두 자식과 상처뿐이었다.
엄마는 어린 두 손자까지 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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