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달아 준 사람들
그녀는 집 안 구석구석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먼지가 남아 있는지점검하고 그 불만의 표시로 직접 자기가 그곳을 닦기도 했다. 이럴 때면 나는 죄인이 되어 얼른 걸레를 빼앗아 더 열심히 그곳을 닦았다.
또, 신발장 안을 진공청소기로 먼지 하나 없도록 쓸어 내야 했다.
커다란 나무 사다리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가 높은 천장에 붙어 있는수많은 전등도 일일이 닦았다. 워낙 집이 높아 사다리 맨 꼭대기에서도 까치발이 되어야 전등에 손이 닿았다.
길고 커다란 복도에 왁스를 칠해야 했으며, 대리석으로 된 커다란 부엌 바닥은 식초를 탄 미지근한 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야했다. 주인 아주머니네 가족들은 실내에서 신발을 벗고 다녔지만,캐네디언 손님들은 습관대로 신발을 신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그들이 가자마자 진공청소기로 그 먼지를 빨아들이고 화학 약품을써서 발자국을 하나 하나 지워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혼자서 자기 앞가림을하는 큰아들과 큰딸을 뺀 두 아이들에게 아침을 준비해 주고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에 보내는 일이었다. 이후 설거지를 하고 세탁실로들어가 이쪽 벽에서 저쪽 벽 끝까지 걸려 있는 옷들을 다림질 했다.
부자들은 다 그런 것인지 이들도 지난번 한국인 부잣집처럼 청바지에 면티는 물론, 팬티 등 속옷까지도 다려 입었다. 옷 세탁도 흰 옷과 색깔 있는 옷을 가려내서 했다.
그리고 청소기를 창고로 가지고 가서 7인승 밴과 2대의 자동차를세차하고 나면 나는 꼬부랑 할머니처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추운 겨울에 꽁꽁 언 손으로 세차하는 고역이란.....인도 음식을 만들지 못하는 나는 주인 아주머니 곁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다듬고 씻고 썰어 주는 보조 역할을 했다. 할머니 집에서 맛본 따스한 인간애같은 것은 찾기 힘든 곳이었다. 오직 육체 노동만 필요할 뿐이었다.
주어진 시간에 일어나 식사하고 일하고 다시 자고 그들의 생활 사이클에 나를 기계적으로 맞추어 끼워 넣으면 그것으로 모든것이 끝인그런 삶이었다. 나는 큰 기계를 돌리는 아주 작은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곳은 어찌 보면 초호화판 감옥과 같았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봄인지 겨울인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일만했다. 내가 단 한 가지 바라는 것은 빨리 빨리 이 지겨운 노동의 시간이 지나가 주는 것뿐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왔고, 얼굴은 언제나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로 화끈거렸다. 손 마디는 굵어져 남자 손처럼 되었고, 가만히 손을 펼쳐 보면 달달 떨렸다. 내일이 밝아 오는 것이 싫었고, 무서웠다. 지난번 뼈가 빠지도록 일을 했던 한국인 집과 너무나 닮은곳이었다. 주인 여자의 먼지 결벽증과 팬티 다림질까지 거의 비슷했다. 리치먼드의 인도 집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모두가 성탄절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나는 살인적인 노동과 싸워야 했다. 200명
의 손님이 온다고 했으며, 그들은 바에 모여 술과 안주를 들면서 축제를 즐기게 될 터였다. 주인 아주머니와 그녀의 친구 몇분과 함께나는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모든 것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커다란 리빙룸에 그랜드 피아노 1대가 놓여 있었고, 나는 손님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캐럴을 연주했다. 파티의 분위기를 의식한 듯아주머니는 손님 맞이는 자기네들이 알아서 할 테니 계속 피아노를쳐 달라고 했다.
피아노가 있는 리빙룸과 손님들이 모여 있는 바는 거리가 조금떨어져 있었지만 피아노 앞뒤의 뚜껑을 모두 열어 놓고 연주를 하니 웅장하게 들렸다. 손님들은 아주 점잖았고 누구 하나 술잔을 들고 집을 배회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앉아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곳으로도 오지 않았다. 간혹 늦게 들어오는 손님들만 리빙룸을 거쳐지나가는 복도에서 흘끗 쳐다볼 뿐이었다.
마침 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손님들이 모두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면서 나만의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모두가 떠난 후 나는 부엌으로 갔다. 술병과 먹다남은 음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기분이 무척좋았는지 혼자서 엄청난 그릇들을 치우고 있는 나를 도와주었다.
날마다 일에 치여서 언제나 피곤하고 고단한 생활이 이어졌다.
노예의 그것과 다름없는 일과가 너무도 고달팠다. 그러나 나는 단한번도 내 생에 대한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것을 나의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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