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오 케" 오늘의 연재 (59 ) 우리 집은 젊은이들의 정거장

조영재 기자 / 기사승인 : 2025-04-20 15:4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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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어깨에
날개를 달아 준 사람들

우리 아파트는 한국의 유학생들에게는 커뮤니티센터이자, 유스호스텔이며, 인포메이션 센터이기도 했다.날이 가면 갈수록 내 마음은 편안해졌고,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서 가끔씩 내 얼굴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당시 밴쿠버에는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을 도와줄 전문적인 유학원이나 봉사 단체가 거의 없었다. 한두 곳의 유학 알선 업체가 있었지만, 그곳을 찾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친구처럼 맞아 주고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내 아파트가 언제나 화제였다.
내 아파트를 찾는 학생들은 점점 늘었고, 그런 학생들을 위하여나는 보다 생산적인 시간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나는 ‘영어 실력 빨리 늘리는 법’, ‘학교와 일상 생활에서의 효과적인 공부법’, ‘학생비자, 방문비자 연장법과 나의 체험담’, ‘자원 봉사’등의 주제로 약식토론회를 열었다. 진행은 내가 했고 몇몇 학생들을 골라 주제별로담당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호응에 고무된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해 모아 온 정보를 요약해서 자료집을 만들었다.


나의 첫 ‘세미나’는 아파트 맨바닥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며 세미나를 하다 배가 고프면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멋진 식탁이 아닌 신문지, 캐비어가 아닌 라면이 우리의 현실이었지만, 그때 학생들과 나는 영어 공부라는 일치된 목표를 가진 동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있었다. 학생들은 몸이 아파도 나를 찾았고, 잘 데가 마땅치 않을때도 나를 찾았다. 배가 고파도 나를 찾아왔으며 김치가 먹고 싶어도 나를 찾았다. 또한 공부가 잘 안 될 때도, 실연을 당해도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의 해결사로서, 이웃으로서, 언니와 누나로서, 또한 동료로서 있는 힘을 다해 도왔다. 학생들은 입에서 입으로 ‘김옥란’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밴쿠버 이장님’이라 불리고 있었다. 유학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나섰으나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빈약했다.나를 알아주는 몇몇 학생들의 성원과 그것에 감복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내 열성뿐이었다.
나는 정말 학생들의 일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그 어떤 계산도 앞세우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누나와 언니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었다. 이런 자세는 결국 오늘날의 내가 있게끔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토양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밴쿠버 섬의 빅토리아 시에서 공부를 하던 여학생 2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우리를 좀 구해 주세요.”
나는 첫 배를 타고 그들이 머무는 학교와 기숙사를 찾아갔다. 학교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들은 나는 학생들의 요구에 일리가 있다고판단하고 그들을 밴쿠버로 데리고 나와 2주 동안 내 아파트에 머물게 했다.
비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던 그 시절, 공항에서는 종종 급한 연락이 왔다. 방문비자로 캐나다에 들어오려다가 공항의 입국 심사에걸려서 도와 달라는 긴급 구조 요청 전화였다. 말을 잘못하여 추방명령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부푼 꿈을 갖고 들어왔다가 쫓겨날 위기에 처한 이들의 사연은절박했다. 나는 전화를 받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가 “내가 보증을 서겠다”며 그들의 여권을 이민국에 담보로 잡혀 놓고 일단 내아파트로데리고 와서 재웠다. 학생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 앞에 당황하고낙담해 밤새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어제의 담당 심사관과 통화를 해서 일의 앞


뒤를 다시 설명했다.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그들은 “다음엔 그렇게하면 안된다”는 주의와 함께 “예정된 스케쥴대로 캐나다에서 생활하라”며 여권을 건네주었다.
한번은 추방 명령을 돌이키지 못한 가슴이 아픈 일도 있었다. 밴쿠버 섬 빅토리아 시에서 중학교 3학년생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졌다. 인종 간의 싸움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한편에 우리 한국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찰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멈추기는커녕 며칠동안 무리를 지어 다니며 싸웠다고 한다. 결국 경찰은 한국 학생 중주동자급 2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한국으로 당장 떠나라는 가혹한 처벌이었다.
나는 그들이 떠나야 하는 하루 전날에야 연락을 받았다. 학교에서 이들의 한국행 항공권까지 사 놓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움직여보았지만 이미 내가 도와줄 수 없는 단계까지 가고 말았다. 나는 유학 일을 하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사소한 민원도 많았다.
“한국에서 막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니 좀 도와주세요.”
“자전거를 타다가 다리를 다쳤어요.”
“이사하는데 짐이 많아요. 좀 도와주실래요?”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김옥란’을 찾았다. 또한 학생들은 아파트를 렌트할 때 관리인과 말이 안 통해도 나에게 전화를걸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화 통역을 해 준 뒤 보증인이 되어 주기도 했다. 나는, 학생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엔 어느때, 어느곳에든 달려갔다. 학생들이 있는곳엔 늘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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